다음은 이순신이 1593년 윤11월 17일에 경영자의 입장에서 올린 《연해안의 군사와 양곡과 병기들을 전부 수군에 소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장계》이다.

 

※ 《청연수군병양기전속주사장》 1593년 윤11월 17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신이 전날에, 3도에 영을 내리시어 전함을 더 만들게 하고 또 연해안의 각 고을에서 징발한 장정들과 군량과 병기들을 모두 수군에 소속시켜 주시기를 청하면서, 그 사연들을 적어서 이미 장계하였습니다.

 

지금 한창 전선을 건조하는 일을 독촉하여 연말 안에 다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정원 중에는 전선들을 한 곳에 모아 바다를 뒤덮듯이 진을 치고는 곧바로 부산으로 나아가 적들이 도망갈 길을 끊어 막고 북소리 한 번 크게 울려 모조리 무찌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미 3도 수사들에게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고 두 번 세 번 거듭 다짐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3도 연해안 고을에서 긁어내듯 징발해낸 장정들은, 비록 명부에는 그 이름이 올라 있어도 노약자와 사고로 징발 불가능한 자들이 절반이나 섞여 있기 때문에, 실제의 숫자는 얼마 되지 못합니다. 뭍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바다에서의 싸움은 돌아보지도 않고, 또 전하의 분부 가운데 군사를 함부로 (수륙 간에) 이동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계속 공문을 돌려 시도 때도 없이 수군 병사들을 징발해 가는데, 혹은 명나라 군사들과 손발을 맞춘다는 이유로 징발해 가고, 혹은 복병시키고 파수 보게 한다는 이유로 징발해 가고, 혹은 의병군과 교대시킨다는 이유로 징발해 가기를 전날보다 배나 더하는 실정입니다.

 

또한 군량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변이 일어난 초기부터 계속 실어내 가고, 또 명나라 군사들을 뒤치다거리 하느라 약간 저축해 놓았던 것까지 거의 다 없어진데다가 뭍에서 싸우는 크고 작은 여러 진영에서 끊임없이 실어내 가다보니, 연해안 일대의 백성들은 뭍으로 바다로 서로 바삐 오가느라 이도 저도 견디기 어려워서 아예 처자와 가솔들을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자들이 길 위에 이어져 있으니 참으로 걱정되옵니다.

 

전라도 연해안의 각 고을이라 해도 좌도에 다섯 고을, 우도에 열네 고을이 있을 뿐인데, 관찰사 이정암이 군대 편성을 개정하면서 좌도에는 광양, 순천, 낙안, 흥양, 보성을, 그리고 우도에는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진도 등 각각 다섯 고을씩만 수군에 소속심키고 그 밖의 다른 고을은 전부 육군 장수들에게 전속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좌우와 우도의 각각 다섯 고을의 군량을 각처에서 그처럼 징발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좌도와 우도에서 더 만들고 있는 전선이 모두 150척이며, 탐색선과 협선이 150척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사부와 격군의 수만 해도 모두 무려 2만 9천여 명이나 되는데, 그 숫자를 채울 길이 없어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되옵니다.

 

통제사의 벼슬에 올랐지만 수군 소속 9개 고을이 육군에 편입되었기에 수군력 증강정책의 추진은 진척되기 어려웠다.

 

※ 《청연수군병양기전속주사장》 1593년 윤11월 17일 ※
경상우도 연해안 여러 고을은 거의 몽땅 거덜이 나서 군사를 뽑아 채우고 군량을 조달해낼 길이 없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조금 보존되었다고 할 만한 곳은 남해 한 고을뿐인데, 그곳마저 수군과 육군에서 연달아 징발해 가니 겨우 한둘 남아 있는 백성들로서는 지탱해 나갈 길이 없습니다.

 

고성, 사천, 곤양, 하동 등의 고을들은 난리를 치른 뒤로 모두들 숨고, 그 나머지 백성들은 나물 캐고 고기 잡아 겨우 연명해 가고 있는 형편인데, 그들마저 수군에서는 사부나 격군이나 심부름꾼으로 뽑아가고, 또 육군에서도 인원수를 정하여 서로 징발해 가고 있습니다. 이 도에서 더 만들고 있는 전선은 모두 40여 척이고 탐색선과 협선이 40여 척인데, 여기에 필요한 사부와 격군의 수만 해도 무려 6천여 명이나 되는데 그 수를 채울 길이 없습니다.

 

충청도는 우도 연해안 고을들에 적들이 침범하지 못하여 전(前) 수사 정걸이 혼자 내려와서 신의 진영에 같이 있으면서 전선을 밤낮 가리지 말고 급히 보내라고 그 도의 우후와 여러 고을에 두 번 세 번 거듭 전령을 보내어 독촉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정걸이 갈린 뒤에 새로 부임한 수사 구사직에게 전선 60척을 더 만들고, 탐색선 60척을 기한 내에 독촉하여 만들어 군량과 전쟁무기 등을 넉넉히 준비해 가지고 정원 안으로 일제히 달려오라고 두 번 세 번 거듭 공문을 보냈으며, 심지어 신의 군관인 부장 방응원을 직접 보내어 공문의 내용을 설명해주도록까지 하였지만, 길이 먼 데다 여러 가지 조치와 준비가 덜 되어서인지 아직도 회답이 없습니다.

 

배와 노가 아무리 많아도 격군이 모자란다면 무슨 수로 배를 운행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격군은 채워지더라도 군량이 떨어진다면 무엇으로 군사를 먹이겠습니까.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빠질 수 없는 것인데도 군사의 징발과 군량의 조달이 모두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연해안 변방 백성들의 괴로움이 내지 백성들보다 배나 될 뿐 아니라, 그보다도 당장 배를 움직이고 군사들을 먹이는 문제를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더 한층 답답하고 걱정됩니다.

 

이처럼 지극히 긴요하고 시급한 일을 주선하고 조처하는 일이야말로 하루가 급한데도 신은 영남에 있고 또 각 도의 순찰사들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만나 의논하지 못하고 다만 문서로만 왕복하며 서로 묻고 있으니, 그 사이에 누설되는 바 또한 많을 뿐 아니라 올해도 이미 저물고 봄철 방비가 바로 눈앞에 닥쳤는데 하는 일은 뜻대로 안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고 했다. 참으로 어려웠던 것 같다.

 

※ 《청연수군병양기전속주사장》 1593년 윤11월 17일 ※
그런데 수륙으로 적을 토벌함에 있어서는 동시에 함께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도 요즘 와서는 논의가 분분하여 수군에 대한 온갖 방책 중 열에 한 가지도 실시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에 난리가 일어난 지 수년 동안 온갖 것을 경영하며 한결같이 품었던 소원이 그만 허사가 될 형편입니다.

 

신과 같이 노둔하고 모자라는 자야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지만, 이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이 때에 매사를 임시땜질식으로 처리하다가 또다시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뒷날에 가서 아무리 후회해도 결단코 되돌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나 깨나 생각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앞으로는 3도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각 고을에서 징집하는 장정들과 군량과 병기들은 모두 함부로 육군 소속으로 이동시키지 말고 수군에만 전속시키도록 도원수와 3도 순찰사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각별히 신칙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위의 장계를 올린 후 이순신은 1593년 12월 29일, 경영자의 입장에서 다시 수군 소속의 인원과 물자를 육군으로 차출해 감으로써 수군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연해안 군병과 군량과 무기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명령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 《청연수군병량기물령체이장》 1593년 12월 29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작년에는 다행히 종묘사직의 신령이 돌보아 주신 덕택으로 여러 번 해전에서 승첩했던 것이오나 금년에 와서는 흉악한 적들이 든든히 자리를 잡고 곳곳의 소굴 속에 들어 앉아 무서워 항전하지 아니하므로 해가 다 되도록 적의 길을 끊고 파수를 보았건만 아직도 공을 이루지 못하여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매번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토론하여 훌륭한 의견을 채택하고, 전선을 두 배나 더 만들고, 연해안 장정들을 남김없이 징발하여 사부와 격군을 온전히 갖추어 명년 정월부터 합세하여 편대를 나누어 곧바로 부산으로 나아가 물길을 끊어 막고 죽기를 각오하고 한 판 크게 붙어 싸우겠다는 사연을 낱낱이 들어 장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수군에 소속된 여러 하급 관리들과 군사들과 군량과 무기들을 육지에서 싸우는 여러 곳에서 계속 옮겨가고 있습니다.

 

연해안 백성들은 수군과 육군들의 침탈을 번갈아 받게 되니 이리 저리 바삐 뛰어다니며 어찌할 줄 모르다가 길 위에서 흘러 다니기 때문에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텅텅 비어 있는 실정입니다.

 

전라우도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열 네 고을 중에서 장흥, 해남, 강진, 진도, 영암 등 다섯 고을은 그대로 수군에 소속되게 하였으나 그 나머지 아홉 고을은 육군으로 옮겨 소속시켰기 때문에 전선을 더 만들던 일을 중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바, 국가의 위험이 극도에 이른 이때 해전에 관한 일은 방책을 세울 길이 없게 되어, 위로는 전함을 더 많이 만들라는 전하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또 아래로는 미천한 신이 여러 해를 두고 경영해오던 뜻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군들은 변란이 일어난 뒤로 교묘하게 병역을 피하기 위하여 서로 옮겨 다니며 사는데도 나쁜 수령들은 도망갔다고 핑계대고 끝내 잡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변란이 일어난 후로 저 남원 같은 고을들의 수군은 부족한 숫자가 천 명이 넘고, 옥과, 남평, 창평, 능성, 광주 같은 고을들은 혹은 칠팔백여 명 혹은 삼사백여 명이나 되는 형편이어서, 새로 만드는 전선에 쓸 사부나 격군은 고사하고, 원래 있던 전선의 사부와 격군 중에서 죽은 숫자조차 채울 인원이 없어서 비록 수백 척의 전선이 있다 하더라도 적을 무찌를 도리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이후로는 연해안 고을의 군사와 군량과 무기들은 수군에 전속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고 지시하는 글을 내려주시고, 또 아울러 전라우도의 연해안 고을들도 다시 수군으로 돌려주시고, 수령들에게 지시하여 병역을 기피한 수군들을 빠짐없이 붙잡아 오도록 하라고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순찰사들에게 각별히 신칙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 《청설둔전장》 1593년 윤11 17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여러 섬들에 비어 있는 목장에 명년 봄부터 농사를 짓되 농군은 순천, 흥양의 유방군(방위군)들을 동원하고 그들이 전시에는 나가 싸우고 평소에는 들어와서 농사를 짓게 하자는 내용으로 이미 장계를 올렸으며, 또 그것을 승낙해 주신 말씀을 하나하나 들어 감사와 병사에게 공문을 띄웠습니다.

 

그런데 순천부의 유방군은, 순찰사 이정암의 장계에 의하면, 광양 땅 두치(다압면 섬진리)에 새로 설치되는 첨사진으로 옮겨다 방비시킬 계획이라고 하니, 돌산도에 들어가 농사지을 농군을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정암 감사가 순천의 유방군을 두치의 첨사진으로 옮기려 하자, 그렇게 하면 돌산도의 둔전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반대하고 있다. 이순신은 두치에 첨사진 하나를 더 구축하는 것보다는 한산도의 군량미와 피난민의 생활 안정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때 한산도가 무너지자 10만의 왜군이 전라도 쪽으로 몰려왔고 두치의 첨사진에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갔다.

 

후에(1597년 12월) 울돌목 승첩으로 정유재란의 위기를 벗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때서야 수군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9개의 후방 고을을 수군 쪽으로 돌려주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2월 25일 ※
눈이 내렸다. 하오 6시경 순찰사 황신이 진중에 와서 군사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하였고, 연해 19개 읍을 수군에 전속시키도록 했다. 저녁에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돌려주기는 했지만 이순신의 수군력 증강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진 후였기에 또 하나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였다. 경영학의 시각에서 보면 이정암의 첨사진 구축 계획은 애초부터 잘못된 전략이었다.

 

※ 《청설둔전장》 1593년 윤11월 17일 ※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난리를 피하여 각 도로 떠돌아 옮겨 다니는 사람들은 한 군데 붙어 살 곳도 없고 또 먹고 살 생업도 없어서 보기에 처참한데, 이런 사람들을 이 섬으로 불러들여 살게 하면서 힘을 합쳐 농사를 지어 그 절반을 나누어 갖도록 한다면(나머지 절반은 나라에 바치고), 공(公)과 사(私) 양쪽에 다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흥양현의 유방군은 도양(고흥군 도양면) 목장으로 들어가서 농사짓게 하고, 그밖에 남은 빈 땅은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병작케 하면서 그곳의 말들은 절이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옮겨 모은다면, 말을 기르는 데에도 손해될 것이 없고 군량 조달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 후, 이순신은 조정에서조차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던 수군 재건에 나섰다. 이순신이 육지의 백성들을 남서해의 섬으로 옮기고 둔전 경영으로 전란을 수습해 가자 붓글씨 쓰기와 시문놀이밖에 모르던 조정은 그때서야 수군 경영의 중요성을 깨닫고 9개 고을을 수군 쪽으로 돌려주게 된다.

 

※ 《청설둔전장》 1593년 윤11월 17일 ※
전라우도의 강진 땅 고이도(완도군 고금면)와 남해 땅 황원(해남군 황산면) 목장은 땅도 기름진데다 또 농사지을 만한 땅도 무려 1천여 섬의 종자를 뿌릴 만한 면적이니, 갈고 씨 뿌리기를 철만 맞추어 한다면 그 소득이 무궁할 것입니다. 그러나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병작하게 하고 관에서는 그 반만 거두어들이더라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군량 공급 문제만 해결되면 앞날에 닥칠 큰일을 치름에 있어서 군량이 떨어져서 다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야말로 시무에 맞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방군에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은 신이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감사와 병사들이 스스로 나서서 때맞추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봄 농사철은 멀지 않았는데 아직도 이에 대한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조정에서는 본 도 순찰사와 병사에게 다시금 그렇게 하라는 분부를 거듭 밝혀 주시기를 엎드려 청하나이다.

 

그리고 돌산도에 있는 국가 소유의 둔전은 묵어 있은 지 벌써 오래된 곳인데, 그곳을 경작하여 군량에 보태야겠다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농군은, 각처에서 본영에 들어와 수자리 사는 군사들 중에서 적당히 헤아려 뽑아내어 들어가서 농사짓게 하려고 하였으나, 곳곳이 수비하기에 바빠서 뽑아낼 사람이 없어 끝내 경작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묵어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 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내어 경작시켜 그 토질을 시험해 보았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로 5백 섬이나 되었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 창고에 받아들여 놓았습니다.

 

이순신은 10살 때부터 아산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또 32세 군관 시절부터 둔전 경영을 실천하였는데, 이 분야에 관해서는 전문가였으며, 영 · 정조 시대의 실학자인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에 앞선 실학적 경영자였다.

 

※ 《선조실록》 1593년 10월 18일 ※
비변사에서 건의하였다.

“옛적에는 싸움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먼저 둔전책을 강구하였습니다. 이는 일정한 수확 이 외에서 곡식을 얻으려 했던 조처인 것입니다. 전에 이미 이순신의 장계에 따라서 병사와 수사에게 둔전을 경영하라고 각 도에 공문으로 지시하였습니다. 각 진보의 첨사 · 만호와 각 고을의 수령들은 광활한 목장이나 관개할 수 있는 곳을 가려내어 둔전을 만들고 형편대로 농사를 짓게 하되, 그 중에 곡식을 가장 많이 수확한 사람을 도(道) 마다 각 1인씩 선발하여 승진 등용하기도 하고 포상하기도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권면하게 되어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8도의 감사에게 알려서 즉시 시행하게 하되, 각 고을과 각 진(鎭)의 둔전을 경영할 장소를 기록해서 보고하게 함으로써 뒷날 상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대답하였다.

 

“뜻은 좋지만 우리나라의 사정은 중국과는 다른데 농사지을 백성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백성들 또한 침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포상하는 일에는 반드시 황당하게 거짓을 꾸미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다시 살펴서 하도록 하라.”

 

이순신이 둔전을 경영해 보고 조정에 보고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주청한 내용이다. 그러나 선조는 ‘우리나라의 사정은 중국과 다르다’ 면서 둔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백성들 또한 침해를 입게 될 것’ 이라고 하였는데, 농사를 짓고 있으면 왜군들이 들이닥쳐 약탈할 것이기에 그 같은 경우를 우려한 것 같다.

 

그런데 선조가 우려했던 1593년 10월 18일 무렵은 왜군들이 부산 · 김해 · 가덕도 · 거제도 북단에 주둔해 있었고, 조정은 한성으로 복귀한지 일주일 만이며, 그 위에 명 · 왜 간에 강화회담이 본격화 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8도에서 둔전을 시행하더라도 왜군들이 침해할 수 없었다.

 

‘거짓 꾸미는 일이 있게 될 것’ 이라고 했는데, 둔전 경영에서 행정은 종사관(이순신의 종사관은 정경달)이 맡아서 하면 되는데도 선조는 대책 없이 걱정만 했다.

 

※ 《이문신차종사관장》 1593년 윤11월 17일 ※
신이 이미 통제사의 책임을 겸하여 3도 수군의 장령들이 모두 휘하에 있게 되었으므로 감독하고 지휘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옵니다. 신은 영남 바다에 있으면서 글로써만 먼 길에 연락하기 때문에 많은 사무가 신속히 실행되지 못하옵니다. 그리고 또 도원수, 순찰사가 머무는 곳에도 결재를 받아야 할 일이 역시 많은데, 거리가 서로 멀어서 더러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일일이 어긋나게 되므로 못내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문관 한 사람을 순찰사의 준례대로 종사관이라 부르고 왕래하며 의논을 통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종사관이 소속 연해안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감독 처리도 하고 사부와 격군과 군량을 계속해서 마련할 수 있도록 한다면 앞으로 닥쳐오는 큰일을 만 분의 하나라도 치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섬들에 있는 목장 가운데 땅이 비어 있어 농사를 지을만한 곳이 있는지도 조사해 보아야 하겠으므로 감히 이에 품의 올립니다. 조정에서는 충분히 헤아리시어 만일 사리와 조정의 체면에 무방하다면, 장흥 사는 전 부사 정경달이 현재 자기 집에 있다고 하니 특별히 임명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통제영에도 종사관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는데, 이 역시 3도수군통제영 창업 작업의 일환이다.

 

※ 《어영담위조방장장》 1593년 윤11월 17일 ※
지난 11월 5일에 도착한 광양 가관 김극성의 공문에 의하면, “좌의정(윤두수), 도원수(권율)가 같이 의논하고 써 보낸 공문에 ‘광양 현감을 장계하여 파직하고 그 대신 가관으로 임명하였으니 도장과 문서를 인계하여 공사를 시행하도록 하라. 또 두치 길목을 파수 방비하는 일을 경솔히 하지 말고 검칙하여 사변에 대비하라.’ 고 하였기에, 지난 11월 2일 이 고을에 부임하였으나 현감은 이미 해전에 출정하고 없어서 도장과 문서를 인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관청의 창고를 봉쇄한 후 공무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현감 어영담은 이미 파직되었지만, 그는 바닷가에서 자라나서 배질에 익숙하고 영남과 호남의 물길 사정과 섬들의 지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또 적을 토벌하는 일에 힘과 정성을 다하므로 작년 전쟁하던 날에도 매번 선봉장으로 나서서 여러 번 큰 공을 이루어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내세울만한 인재입니다.

 

비록 파직되었지만, 어영담을 수군의 조방장으로 다시 임명하여 끝까지 계획하고 방책을 세워 큰일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앞서 보았듯이, 이순신은 광양 고을에 대한 관리가 부실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어영담의 유임을 탄원해서 복직시킨 바 있다. 그런데 윤두수가 이를 재론해서 또다시 파면되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파면된 어영담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주기를 건의했다. 이순신의 건의는 곧 받아들여졌고, 어영담은 제2차 당항포해전 때 조방장으로 출전하여 승첩한다.

 

이순신과 어영담의 관계는 지금까지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영담은 중요한 연구 모델이다.

 

※ 《하납철겸사유황장》 1593년 윤11월 17일 ※
이번에 더 만드는 전선에 쓸 지자 · 현자 총통은 만들 길이 없어서 마련할 방책을 조목조목 진술하여 장계하였던바, 회답 중에 쓰여 있는 사연들을 낱낱이 들어 겸 순찰사 이정암에게 벌써 공문을 띄웠습니다. 지자총통 한 자루의 무게가 250여 근이나 되며 현자총통 한 자루의 무게 역시 50여 근이나 되는바, 이 같이 물자의 힘이 고갈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관청의 힘으로도 손쉽게 변통하기가 어려운 실정인지라, 배 짓는 일은 거의 다 끝났으나 거기에 쓰일 기구가 한꺼번에 되지 않아 참으로 걱정되옵니다.

 

그래서 신이 중들을 모아 따로 화주(化主)라고 부르고 권유하는 글을 지어 주어 마을 곳곳에 두루 다니며 쇠붙이를 구하여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태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정은 다 떨어져 그 역시 쉽게 되지 않아 밤낮으로 생각하되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들으니, 원근의 여러 고을들에는 간혹 쇠를 바치고 신역을 면제받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다는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이에 감히 품의를 올리오니, 혹시 바치는 철물의 무게에 따라 상으로 직함을 주기도 하고, 벼슬길을 틔워 주기도 하고, 병역을 면제해 주고, 천한 신분을 면하게 해준다는 내용이 공문을 만들어 내려 보내주신다면, 쇠를 거두어 모아 대포를 만들어 군사상 중요한 일을 치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 염초는 자체적으로 넉넉히 끓여 만들어 내었으나 거기 넣을 석류황은 달리 구할 데가 없으므로, 옛 창고에 있는 유황 200여 근 쯤 꺼내어 내려 보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그간 이 같은 기록들에 대해서도 많이 조명해 왔다. 그런데 경영학의 시각에서 보면 화약무기 분야의 경영을 챙기고 있음이다.

 

※ 《주사소속읍물정육군장》 1593년 윤11월 21일 ※
삼가 상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여러 고을의 군사들과 군량을 육군의 여러 진영에서 이리저리 징발해 가고 있다는 사연은 이미 다른 장계에서 대강 아뢰었습니다.

 

지난 11월 17일에 도착한 겸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총병의 지시에 따라 도원수가 내려 보낸 공문에서 조선 병사 3만 명의 징발을 전부 본 도에 다 배정한 다음 지금 징발을 독려하고 있는 중인데, 소속된 고을들을 3개 위(衛)로 나누어 방어사와 병사에게 각각 5천 명, 또 좌우수사에게 각각 2천 명씩 나누어 배정하고, 또 소속된 각 고을의 포구에도 나누어 배정한 후, 속히 정제하여 원수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고 독촉하였다.”

 

연해안 사부와 장정들을 계속 징발해 가는 일도 오히려 답답하고 걱정되는데, 좌우도의 수군에서까지 정예병 4천 명을 배정하여 그대로 징발하도록 독촉한다고 하는바, 수군의 사부들을 남김없이 뽑아내더라도 4천이란 숫자를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방어사나 병사들은 육지에서 싸우는 대장들로서 언제나 육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각각 5천 명의 군사를 갖춘다는 것이 이치상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수군으로 말하자면, 바닷길을 끊어 막고 있으면서 방비하는 것이 육지와는 서로 다른데, 바다를 떠나서 육지로 올라오라는 것은 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요즘 적의 정세를 보면 육지 쪽 웅천 등지의 적들은 거제로 왕래하면서 수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바, 적들의 흉측한 꾀와 비밀스러운 계책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수군에 소속된 정예 병사 하나가 왜적 1백 명을 당해 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뽑아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사리를 들어 설명하여 우선 회답을 써 보냈습니다. 그러니 조정에서도 순찰사 이정암과 도원수(권율)에게 각별히 신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군 징발 문제가 이처럼 혼란스럽게 거론되면 신이 거느리고 있는 수군들을 통솔해 나갈 길이 전혀 없어지고 바다를 방비하는 일에 있어서도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수군의 형세가 나날이 약해진다면 해상으로 덤벼드는 적을 막아내기가 어려워질 것이므로, 신은 밤낮 없이 근심하고 있사옵니다.

 

이여송의 3만 5천군이 귀국하게 되자 조선군 3만 명으로 자주국방을 하려고 했던 것이 위 사건의 발단이다.

 

3만 명을 ‘모두 전라도에 배정한 것’ 이 1차적인 문제점이고, 또 이로 인해 수군력 2배 증강계획과 충돌하게 된 것이 2차적인 문제점이다.

정유재란 때 10만여 명의 왜군이 대거 건너와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왜군들은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건재해 있는 동안에는 어찌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궤멸시킨 후에는 한산도→전라도→충청도로 북상해 갔다.

 

그 후 조선 수군이 울돌목을 막아내자 충청도까지 북상했던 왜군들은 다시 남해안으로 퇴각해 내려갔다. 유추해 보면, 이 무렵 수군력 증강 계획에 지장을 초래한 조정과 전라감영의 시책에는 수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취해진 것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 《진중시재장》 1593년 12월 29일 ※
삼가 품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지난 11월 23일 도착한 겸 순찰사 이정암이 보낸 공문이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무군사의 공문에 의하면, ‘세자(광수군)께서 전주로 내려와 머무시면서 하삼도(경상우도, 전라좌 · 우도) 무사들에게 과거시험장을 설치하여 선발하려고 하는데, 평상시의 예에 따르면 초시 · 회시 · 전시 등 세 번 시험을 보아야 하지만, 평안도에서의 예에 따라 1차로 초시만 치른 후 곧바로 전시를 시행하려고 하며, 사람은 넉넉히 뽑을 계획이고, 과거시험 날짜는 길일인 12월 27일로 하려는 계획이지만 아직 확정짓지는 않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매우 박두하였고 또 사람을 넉넉히 뽑으려 한다고 하니 이런 취지를 급히 널리 알려서 뛰어난 인재가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난리가 일어난 지 2년 동안 남도의 무사들은 오랫동안 진중에 있었지만 그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줄 길이 없었는데, 이제 들으니 세자께서 완산으로 내려와 머무시게 되어 대소 신민들로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또 들으니 12월 27일에는 전주부에다 과거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바다 위 진중에 있는 모든 군사들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또 기일 내에 도착하기도 어려운데다가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예 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의 경우에는, 경상도에서의 예에 따라,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고, 또 시험과목 중에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이 있는데, 먼 바다 위 외딴 섬에는 말을 달릴 만한 땅도 없습니다. 따라서 말 달리기 대신에 편전 쏘는 것으로 시험 쳐서 뽑는다면 편리할 것 같습니다. 엎드려 조정의 선처를 바라나이다.

 

‘위로하여 기쁘게 해 줄 길’ 이라고 하였는바, 과거를 통하여 진급하게 되는 군사들에게는 큰 경사가 된다. ‘뜻밖의 일’ 은 왜군들의 기습이나 과거를 보러 간 병사가 도망병이 될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사실 수군에게는 말을 탈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말 달리기 대신에 편전 쏘는 것을 시험과목으로 삼자고 건의하였다.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을 채택하려는 실사구시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