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1593년 9월 4일자 장계인데, 장계의 제목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에게서 들은 왜의 정황을 보고하는 장계》이다. 내용은 히데요시의 나고야 사령부에 대한 군영 관계이다.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이순신 · 이억기 · 정걸 등 세 수사가 연명으로 장계를 올렸는데 원균은 연명에서 빠졌다. 이 점도 관심있게 살펴보자.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삼가 왜의 정황에 관한 일로 아뢰나이다.

경상도 고성에 사는 훈련봉사 제만춘이 일본국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 돌아와서 지난 8월 15일 진중에 이르렀는데, 그를 심문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경상우수사(원균)의 군관으로 작년 9월 휴가를 얻어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 웅천에 있는 적의 형세를 탐색하여 보고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웅포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왜의 큰 배 16척이 각각 작은 배를 거느리고 김해강에서 웅천을 향하는 것을 망보고 돌아오다가 왜의 중간 중간 배 6척이 웅포 선창에서부터 영등포 앞바다까지 쫓아와서 붙잡혔습니다.

 

왜군들은 격군 10명과 함께 결박하여 배에 싣고 웅천성 안의 협판중서(와키자카 야스하루)라고 부르는 왜장 앞에 잡아다 놓고 소인에게는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족쇄를 걸고서 여러 왜들이 수직(감시)를 섰으며, 다른 격군들은 여러 왜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1월 13일, 소인은 창원에서 붙잡혀 포로가 된 소년 포로들과 함께 도망갈 꾀를 몰래 의논하다가 일이 탄로나서 소년들의 목은 베어졌습니다.

 

12월 19일, 또 웅천 소년들과 비밀리에 약속을 하였는데 그 소년들이 왜의 말을 하는 사람을 통하여 왜의 통역군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수직(감시)을 배나 엄하게 서므로 도망쳐 나올 도리가 없어서 그대로 겨울을 지냈습니다.

 

금년 2월에 우리나라 수군이 여러 번 웅천 앞바다를 공격하였는데 왜의 장수 하나가 나무화살을 맞아 죽었고, 그 달 22일 우리 수군이 한편으로는 육지로 올라가고 한편으로는 적의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을 돌격하니, 성 안의 왜인들은 거의 다 늙고 병든 자들이라 성을 지킬 계책이 없어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으며, 또 왜장 12명은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중 우리나라 판옥선 2척이 서로 부딪쳐 엎어지자 왜의 부장이란 자가 우리 배에 뛰어 올랐는데 우리 배의 군사가 긴 창으로 그 자의 가슴을 찔러 즉사시켰습니다.”

 

제만춘은 원균의 군관으로 임진년 9월 부산포해전 이후 휴가를 갔다가 귀영길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포로가 되었다. 왜장은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이듬해 2월의 웅천포해전과 판옥선(통선) 2척이 전복되는 사건 등도 기록되어 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그달 26일, 왜장은 소인을 패전한 배의 장수로서 하인 8백 명을 부리는 높은 벼슬아치인 양 문서를 꾸며가지고 배에 실어 평수길(히데요시)이 있는 궁으로 들여보냈습니다. 3월 5일 수길이 머물러 있는 나고야에 도착하니, 수길이 처음에는 소인을 태워 죽이려다가 소인이 글을 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의 서기로 있는 왜인 반개한테 내맡겨 반개의 집에서 5~6일을 지낸 다음 소인의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입혔습니다.

 

‘글을 안다는 소문을 듣고’ 라고 했는데, 일종의 특기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만춘은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 군관이었던 것 같다. 왜 원균 수사는 이 같은 엘리트가, 더욱이 이전에 자신의 부하 군관이었던 자가,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보고하는 자리에 빠지고, 그리고 장계에도 그의 서명이 빠졌을까?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그 뒤 소인이 풍습중으로 전신이 부은 것을 반개가 의원인 중에게 부탁하여 여러 가지 약으로 치료하도록 해서 그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몸이 남의 나라에 있어 새장 속의 새 같으니 고향 그리운 정회를 금할 길이 없어 기어코 동지들과 함께 도망쳐 돌아올 것만 생각하고 조선 사람이 사로잡혀와 있는 곳을 찾아보았더니 큰 집에는 20여 명, 보통 집에는 8~9명, 작은 집에는 3~4명씩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함께 도망갈 뜻을 물어본즉, 혹은 성심껏 승낙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가정을 이루고 있어 돌아갈 뜻이 없는 자도 있었는데, 만리타국에서 비밀한 계획이 누설될까 두려워 마음에 간직만하고 말은 못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조선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일정한 기술을 보유한 특기자들이다. 정유재란 때 끌려간 도공들도 특기자 대접을 받았다. 역사를 소급해 보면 일본의 외래인 특기자 우대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4월 초부터는 김해, 창원, 울산 등지의 고을에서 사로잡혀온 사람과 창원 교생 허영명 등과 혹 편지로 의논을 통해도 보고 또 사람을 통해서 가만히 떠 보기도 했으나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계획이 서로 어긋나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7월 초에 와서 동래에 사는 성돌, 사노 망련, 봉수군 박검손, 목자 박검실, 사노 김국, 김헌산, 종 돌이, 사노 윤춘, 양산 사는 강은억, 박은옥, 김해 사는 갑장(갑옷 만드는 공인) 김달망, 사노 인상 등 12명이 밤낮으로 오가며 의논한 뒤, 7월 24일 밤중에 소인을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배 1척을 훔쳐 타고 노를 재촉하여 육기도까지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25일 순풍에 돛을 달고 떠났는데 왜적의 군량 실은 배 3백 척을 만나 간신히 피해서 육기도로 되돌아가 정박했습니다.

 

보고 내용이 아주 자세하다.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나온 솜씨 등을 보면 역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 군관답고, 또 충성스러운 백성이다.

 

※ 《선조실록》 ※
그러나 양식이 떨어져서 입고 있던 왜의 속옷 한 벌과 겉옷 한 벌을 팔아 쌀 27되(말)와 중간 크기의 솥 한 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8월 3일에 경상좌수영(동래군 남면) 앞바다로 와서 상륙하여 모든 사람들은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가고 소인은 그 동네 사는 황을걸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옷을 팔아서 양식을 보충했다. 그렇다면 조선에 건너 온 왜군 도망병이나 패잔병들도 약탈한 전리품을 밀매해서 그 돈으로 고향으로 밀입국하고 있었을 것이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그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많이 살면서 적들과 사귀어 왕래하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는데, 소인은 이틀 동안 머물다가 양산 땅 사대도(김수군 대저면)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가지고 지나가므로 그 편에 사대도에 이르러본즉, 천성 가덕의 수비하던 수군들이 무려 4백여 호나 살면서 왜적 20여 명을 추장이라 일컬으며 농사짓기와 추수 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인은 8월 10일 웅천 땅 적항역(김수군 장유면) 앞을 지나 상륙하여 13일에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하층민들이 왜인들을 추장으로 ‘모시고’ 전쟁을 그럭저럭 넘기고 있다. 양쪽이 그렇게 섞여서 살고 있었기에 제만춘은 눈치를 보아가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그런데 대개 평수길은 보통 태합(太閤)이라 부르고 큰아들은 관백(關白)이라 부릅니다. 수길이 머물러 있는 나고야는 일본과 영접된 땅으로 일본 서쪽에 있으며 육로로는 21일 길이요, 수로로는 12일 길이며, 대마도까지는 3일 길입니다.

 

작년 5월 수길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고야에 주둔하면서 그곳에 세 겹으로 성을 쌓고 6층 누각을 지었습니다. 6층 누각은 내성 한가운데 있고 수길은 항상 그 위에 기거하였으며, 세 겹으로 된 성 머리에는 모두 층계로 된 사대(射臺)를 설치했는데, 그 총 쏘는 기계와 방어하는 시설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성 안에는 다만 창고와 관사만이 있고 성 밖에는 백성의 살림집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지난 5월 명나라 사신 두 사람(사용재, 서일관)이 나고야에 이르렀는데 처음에는 성 바깥 민가에 있다가 3일을 머문 뒤에 수길이 보좌하는 중 두 사람을 시켜서 혹은 글로써 묻고 혹 통역으로 물으며 또 다시 며칠이 지난 다음에 명나라 사신을 중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수길은 그대로 내성 안 6층 누각 위에 있었고 그 부하들을 시켜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왜인들은 6칸이나 되는 정결한 누각을 높이 짓고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 그 안에 금물을 뿌린 병풍을 치고 앉았습니다. 명나라 사신은 낮은 곳에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방으로 발을 드리운 속에 긴 상을 놓고 앉았는데 그 사이 간격이 십여 걸음이나 되었으며, 밖으로는 구경꾼들이 저자처럼 모였습니다.

 

먼저 일단 술을 부어 돌리고 접대하는 잔치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수길과는 만나지 못하고 다만 왜인들이 뜰 앞에 가득 모여 광대놀이를 하고 피리소리만 들려올 뿐이더니, 예를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명나라 사신을 내성 안 서쪽 객실로 청해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경략 송응창은 강화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명나라 황제의 도장을 새겨서 가짜 칙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주어 보내면서 조선 조정에는 진짜 칙서라고 속였다. 그러자 선조는 명나라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고 조선의 수륙군 장수들에게 출전을 독려했다. 이에 조 · 명 간에는 군사적 마찰이 빚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조-김응서-요시라-고니시의 대화’ 가 진행되었는데, 훗날 칠천량 패전을 초래한 반간계(反間計)의 시작이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소인을 맡은 왜인 반개는 수길 밑에서 서역(글 쓰는 일)을 하는 왜인으로서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문답의 글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그것들을 소인에게 보여주기에, 만약 다행히도 도망쳐 돌아갈 수 있다면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리고 싶은 생각에, 종이에 가득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훔쳐 도망해 올 때 모조리 잃어버리고 목숨만 살아 왔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정신이 흐려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오나 대강만 추려서 말씀드린다면, 명나라 사신이 수길에게 글을 주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조선국에서 전라 경상도의 길을 먼저 트고 왜병을 끌어들인 다음 길을 차단했으니 이는 조선이 거짓으로 속인 것입니다. 조선이 대 명나라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조선 국왕에게 어찌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합께서는 명나라에 정성을 다하는 신하이고, 두 사신도 천자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인데, 만약 두 사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청컨대 보검을 빌려서 배를 갈라 보이겠으며,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는 것은 천만 년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태합께서 보낸 삼성(이시다 미쓰나리), 양사(구로다 나가마사), 길계(오타니 요시쓰구), 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한결같으니, 화친하는 일은 태합께서 스스로 결단한 후 명나라와 관백에게 사신을 보내어 알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명나라 사신이 또 수길에게 글을 한 장 더 써 주었는데, 그 글에서 말한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일본의 무장들은 중국 땅을 넘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모기 발로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지라, 참으로 멀리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명나라 사신이 말했습니다.

 

‘요즘에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으니 한 번만 참으면 천만 가지 일들이 다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글은 명나라 황제께서 조선 임금에게 보낸 글입니다.’

 

그리고 두 나라 사신이 나올 적에 수길이 군대의 위엄을 장하게 하고 배 위에서 서로 만나 칼과 창 열 자루와 은 30근을 선물로 주어 보냈습니다.

 

처음에 소인이 사로잡혀 웅천에 있을 때에 왜장 협판중서가 소인에게 묻기를 ‘작년 7월 한산도 전쟁 때 너도 응당 그 배에 있었을 텐데 일본의 총과 칼과 갑주 같은 것들을 얼마나 얻었느냐?’ 고 하기에, 모른다고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소인이 반개의 집에 반년간 있는 동안 군량 조달하는 문서를 모두 상고해 보았던바, 협판중서의 이름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처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거의 다 패하고 지금은 1천여 명이 남았다’ 고 적혀 있었습니다.

 

한산도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벤 왜군의 수급은 3백 개 정도이다. 제만춘이 와키자카의 기록에서 확인했다는 인명 손실 숫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해전 때 왜선들이 육지에 다가간 시점에서 왜군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갔을 것이기 때문에 인명 손실은 기록에서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다.

 

와키자카가 보름 간 행방불명 상태였고, 부하 장수들이 할복자살한 경우가 있었을 만큼 왜군 수뇌부는 궤멸 상태였다. 또 소속 함대가 연합 함대였고, 그 가운데 와키자카의 직할 병력은 수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육지에 오른 왜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갑옷이나 무기 또는 약탈품을 팔아 고향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제만춘이 왜국에서 도망쳐 올 때 옷가지를 팔아 배삯을 지불했다는 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나고야는 조선 원정을 위해 급조된 도시로 100만의 인구가 저자거리에서처럼 복잡하게 얽혀 살았고, 몸을 파는 여자와 밀항자들도 많았다.

 

아래는 한국일보 《임란 4백년 특집》 기사이다.

 

※ 《임란 4백년 특집》 1991년 12월 16일 ※
조선침략의 본거지였던 규슈의 나고야성은 규모로는 오사카 다음인 일본 제2의 거성이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년간 머물러 있으면서 직접 침략전쟁을 지휘했던 본성 이외에 1백 60여 개 지방영주들이 제각기 출진 병사들을 모아 대기시켰던 부속 성까지 합치면 세계에 유례없는 거대한 성군을 형성했었다. 출정 병사가 한창 많을 때는 10만이 넘는 인구를 포용했던 성곽도시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성의 총면적은, 144,000m가 넘었다. 5층 구조의 천수각이 있언 혼마루를 중심으로 6개의 성루로 구성됐던 나고야성의 연면적은 4,333m였다. 제3의 성루였던 산노마루의 규모가 동서 34칸, 남북 62칸이었다는 안내판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본성을 중심으로 사방3km 안에 1백 60개 부속 성이 자리 잡았다. 최근 발굴조사로 그 중 1백 20여 개는 주춧돌 등이 드러나 위치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 왜장 15명의 진적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이 거대한 성군이 불과 5개월 사이에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거대한 급조 군사도시의 좌진 병력은 10만 2천여 명, 이곳에서 조선으로 출정한 병력은 연 20만 5천 5백 70명이었다. 이 군사도시는 난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역사의 갈피 속으로 묻혀버렸다.

 

역사의 현장을 소중히 보존하자는 움직임은 1976년에 태동했다. 진제이 정은 나고야 성터 안에까지 침입한 민가와 사유지가 된 부속 성들의 터를 사들여 옛 모습을 되살릴 계획을 수립, 연차사업에 착수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평수길이 나고야에 있는 것은 군사 소집과 작전 지휘를 위해서인데 진주와 호남 등지를 다시 치기 위해 정예군사 3만을 뽑아 보냈다고 합니다.

 

‘진수와 호남 등지를 다시 치기 위해서…’ 는 제2차 진주성 공격과 견내량 돌파 작전 때 나고야에서 3만의 정예병을 추가로 보냇음이다. 그래서 당시의 왜군은 ‘16만+3만=19만’ 이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진주성을 무너뜨린 뒤에 왜장들이 진주와 전라도 장흥을 분탕질한 일을 급히 보고하면서 진주목사(서예원)와 판관(성수경), 병사(최경회) 등의 머리를 들여보낸 것을 보고, 수길은 말하기를 ‘이제는 더 할 일이 없다!’ 고 하면서 대판(오사카)으로 돌아가려고 8월 15일과 21일을 택일하고는 그 맏아들 관백을 명년 3월부터 나고야로 보내 주둔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주성 함락 후 일부의 왜군들이 게릴라전으로 구례 지역까지 일시 진출했던 적이 있는데, 히데요시는 이를 왜군 주력의 전라도 진출로 알았던 것 같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조선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들은 기장 · 울산 · 부산 · 동래 · 양산 · 김해 및 웅천 세 곳, 거제 세 곳, 당포 세 곳에 성을 쌓고 집을 지은 뒤에 반은 성을 지키고 반은 들어왔는데, 성을 지키는 왜들은 명년 3월에 교대병을 내보낸 뒤에 들어온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소인이 지나온 (경상)좌수영은 적의 수효와 적선의 수효는 많지 않고 부산포에는 곳곳에 가득 차 있었으며, 배들도 바다 위에 가득하여 얼마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수길은 그 성질이 교만하고 사나워서 왜국 사람들이 ‘언제나 망할 것인가?’ 하고 탄식할뿐더러, 왜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부모처자가 없을 것인가. 여러 해를 남의 나라에 나가 있어 오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수길 때문인데, 수길의 나이 올해 예순 셋이라 죽을 날도 임박했거니와, 만일 죽는다면 어찌 조선 사람들만이 기뻐할 뿐이겠느냐. 우리들도 걱정이 없어질 것이다.’ 라고들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국 백성들도 히데요시를 몹시 원망하고 있었다.

 

※ 《피로인소고왜정장》 1593년 9월 4일 ※
그런데 제만춘은 무과 출신 사람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며 용맹이 뛰어나고 무예도 훌륭하여 용렬한 무리와는 다르므로 당연히 힘껏 적을 쏘아 죽임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할 터인데, 반항도 하지 않고 사로 잡혀가서 도리어 왜놈의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일본에까지 가서 반개와 함께 문서 맡는 소임을 같이 하였으니 신하된 의리와 절개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글을 잘 알고 사리를 아는 사람이어서 수길에게 반년이나 머물러 있으면서 간사한 적들의 책모를 자세히 정탐하지 않은 것이 없어 마치 간첩으로 보낸 사람 같았습니다. 또 본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격군 12명을 데리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그 정상이 가련할 뿐더러 공초한 바를 참작해 보니 다른 포로가 되었던 자들이 돌아와서 아뢰는 공초와 거의 다름이 없사옵니다. 나머지 미진한 일들은 제만춘의 장계와 같이 올려 보내오며 경상좌수사 원균에게도 알렸습니다.

 

이 장계에 대한 《난중일기》의 기록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원균 수사에게는 사후 통보하였는데, 이 무렵 원균은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기가 불편해서 자신의 군관이었던 제만춘의 심문장에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이 때는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교지를 아직 받지 못했기에 세 수사가 연명으로 장계한 것이다.

 

※ 《제만춘전》 ※
고성 출신. 처음에 영남우수영에 소속된 군관으로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9월에 우수사 원균의 명령을 받아 작은 배를 타고 노 젓는 군사 10여 명과 함께 웅천으로 가서 적의 형세를 탐지하고 영등포로 돌아오다가 왜의 병선 6척을 만나 같은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사로잡혀 묶여 갔는데, 왜의 장수 협판이란 자가 있어 제만춘을 따로 가둬두었다.

 

계사년(1593) 9월 24일 밤중에 제만춘이 성우동, 박검손 등 20명과 함께 왜선을 훔쳐 타고 노를 재촉하여 육기도에 이르러 순풍을 만나 동래 수영 아래 배를 대고 8월 13일 본가로 돌아왔다. 15일에 삼도의 네 수사가 합진하고 있는 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의 직책으로서 사실상 모든 군사를 관할하였는데, 제만춘의 신하로서의 절개 없음을 성내어 처음에는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을 불쌍히 여겨 장계를 올리려 가는 인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왜적의 정황을 보고하게 하였던바, 조정에서는 그를 풀어주고 다시 충무의 군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 남방에서는 싸움을 겪은 세월이 벌써 2년이나 되었으나 아직도 왜적의 내정과 기제의 우수성 여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제만춘을 얻은 것을 몹시 기뻐한 나머지 마침내 자청하여 데리고 다니는 군관으로 삼으니, 제만춘 역시 의기를 떨쳐 힘껏 도와 마침내 이순신이 공로를 이루게 하였다.

 

무술년(1597) 노량 싸움에서 송희립의 무리와 함께 앞을 나서 적을 쏘아 명중된 자는 다 거꾸러졌다. 그 뒤에 군관의 한 자리를 종신직으로 얻어 늙어 죽도록 통영에서 관직을 맡았다.

 

아래는 주간한국에서 황영식 논설위원의 《임나일본부》라는 제목의 글이다.

 

※ 《임나일본부》 ※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측 통설의 출발점은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려 있는 진구 황후의 전설이다. 진구 황후를 역사 인물로는 보기 어렵고, 관련 내용 전체가 일본 열도 남부의 통일왕권 수립과정에 대한 설화적 묘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80척의 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의 7국과 4읍을 점령했다’ 는 내용만은 연대까지 369년으로 비정(比定)하는 등 일본 측에서 집착을 보였다. 또 《일본서기》의 긴메이기 등은 임나에 ‘일본부’ 가 존재했다는 점은 물론 그 관료들의 이름이나 활동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고 있다. 한편으로 해석 논쟁이 아직까지 분분한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391)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면서 결정적 증거라고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내용이 많이 축소되고 해석 방향도 다양해졌지만, 일본식민사관의 중심을 이룬 임나일본부설의 골격은 1720년에 완성된 《대일본사》에서 이미 갖춰졌다. ‘진구황후 때 삼한과 가야를 평정하여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삼한을 통제했다’ 고 적었다. 이런 일본의 인식은 1949년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왜가 진구황후 섭정 49년(369)에 가야 지역을 군사 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성립시킨 후 설치한 임나일본부를 중심으로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긴메이 천황 23년(532) 신라에게 빼앗겼다는 내용이다. 고대 일본의 이른바 ‘남선경영론’,, 또는 ‘출선기관론’ 의 골자이다.

 

히데요시 막부의 조선 침략이 신공(神功) 황후의 임나 설을 따랐던 면은 없을까? 아무튼 일제 때 총독부는 임나의 한반도 군영론을 내세워 한일병합을 정당화시키고자 했다.

 

※ 《안창호 평전》 ※
이토와 회견하였던 도산의 후일의 기억은 대강 이러하였다.

 

이토는 일본의 동양 제패의 야심을 교묘한 말로 표시하였다. 자기의 평생의 이상은 셋 있는데, 하나는 일본을 열강과 각축할만한 현대국가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며, 셋째는 청국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 후,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목적을 거의 달성하였으나 일본만으로는 도저히 서양세력이 아시아에 침입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으므로, 한국과 청국도 일본만한 역량을 가진 국가가 되도록 해서 선린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는 지금 한국의 재건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잇는데, 이것이 완성되고 나면 자기는 청국으로 가겠노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토는 넌지시 도산의 손을 잡으면서 그대가 나와 같이 이 대업을 이루지 않겠느냐면서 공감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토는 도산에게, 자기가 청국으로 갈 때에는 그대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삼국의 정치가가 힘을 합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자고, 이렇게 매우 음흉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삼국이 정립하여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데에는 동감한다. 또 그대가 그대의 조국 일본을 혁신한 것은 치하한다. 또 한국을 귀국과 같이 사랑하여 도우려는 호의에 대하여는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그대가 한국을 가장 잘 돕는 방법이 있는데, 그대는 그 방법을 아는가? 하고 이토에게 물었다. 이토는 정색하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도산은 일본을 잘 만든 것이 일본인인 그대인 것처럼, 한국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혁신케 하라. 만일 명치유신을 미국이 와서 시켜서 하였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명치유신은 안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업을 이루지 않겠느냐?’ 고 하였다는데, 이때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는 동도서기가 중단되고, 화혼서용을 강요받던 때였다. 이토가 제의한 것은 화혼서용 형의 식민지 경영론이며, 신공 황후의 임나부 경영론을 제의한 것이었다.

 

‘만일 명치유신을 미국이 와서’ 라고 한 것은, 미국이 일본에 와서 화혼서용의 일본식 국가 경영을 해낼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후 일제는 조선과 만주에서 식민지형 경영에 들어갔다.

 

● 삼도수군통제사

 

아래의 장계는 이순신이 통제사의 교지를 받고 본영으로 돌아와서 올린 《본영으로 돌아왔음을 보고하는 장계》이다.

 

※ 《환영장》 1593년 11월 17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오래된 적들이 아직도 변경에 웅거하고 있어 그 흉한 계교를 측량키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명년 봄 해상 방비는 전보다 백 배나 더 애써야 할 터인데도 한 해가 다 가도록 바다에 진을 치고 있어 굶주린 군졸들이 병들어 극도로 파리해져 겨우 사람형상으로 목숨만 붙어 있고 또 죽은 자도 거의 절반이나 되었으나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당장 날씨가 추워져서 귀신같이 참혹한 몰골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어찌 모두 죽지 않기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며 장차 어떻게 활을 당기며 배를 부리오리까.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 아픈 것이 살을 베는 듯하옵니다.

 

뜻밖에 이번 3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을 변변치 않은 신에게 내리시니 놀랍고 황송하여 마치 깊은 골에 떨어지는 듯합니다. 신과 같은 용렬한 재목으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할 것이 분명한지라, 신의 애타고 답답함이 이 때문에 더하옵니다.

 

대치하고 있는 왜군은 돌아갈 기미도 없고, 군량미가 부족해서 제대로 먹지 못한 군사들은 ‘극도로 파리해져서 겨우 사람의 형상’ 을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10월 9일 3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교지와 함께 장졸들을 교대로 휴가 보내라는 명령서가 내려왔다.

 

※ 《환영장》 1593년 11월 17일 ※
지난 10월 9일에 받은 분부 중에 ‘경(卿)이 통제사로서 책임을 지고 3도의 장령과 군졸을 두 패로 나누어서 집에 돌아가 번갈아 휴양하게 하고 겸하여 의복과 식량까지 마련해 주라’ 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경상도는 분탕질을 당한 후여서 선부(船夫)와 격군이 더욱 엉성하지만, 진을 친 곳이 바로 자기 도 안이니 틈을 보아 오가며 수시로 번갈아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전라좌도 역시 그리 멀지 않으므로 계속하여 번갈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라우도는 물길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당장 바람 세찬 날씨에 험한 파도를 헤치고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왕복할 경우 자칫하면 달포나 걸리므로 그 도의 수사 이억기를 시켜서 전선 31척을 거느리고 이미 지난 11월 1일에 앞서 띄워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난 11월 1일에 이미 전라우도 수사 이억기에게 전선 31척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게 하면서, 연말 안으로 전쟁기구도 수리하고, 또 군사들도 쉬게 하고, 전선도 더 만들고, 격군과 수군 및 힘센 군사들을 더 징발하고, 매사를 일일이 점검하여 미리 정비해 있다가 내년 정월 보름 전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으로 돌아오도록 하되, 전선 50여 척은 사변에 항시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졸들 중에 도망간 자들이 십중팔구나 되고, 자기 차례에 수자리 살려고 나오는 자는 열에 한 둘도 안 됩니다. 게다가 민가나 마을들은 텅텅 비었고 굴뚝에서는 연기조차 나지 않아 쓸쓸하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병이 생길 경우 일가와 이웃에서 대신 징발하여 충당하려는 대책 또한 기대할 바가 못 되므로, 가장 먼저 배를 탄 군졸들조차 교대시켜 주지 못하고 오래도록 바다 위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굶주림과 추위로 내몰고 있으며, 게다가 돌림병은 지난 봄철이나 여름철보다 더욱 심하여 무고한 군사들과 백성들이 잇달아 죽어 넘어짐으로써 군사들의 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병력(兵力)이 약해지고 있는 형편인데, 참으로 앞으로의 일이 더욱 걱정됩니다.

 

무지한 군졸들이 다만 일시의 편한 것만 생각하고 원망하는 말들이 자자하기에 신은, “명나라 군사들은 만 리 밖으로 원정와서 풍상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근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적을 토벌하고자 죽기로써 기약하는데, 본국 사람이 적의 해독을 아침저녁으로 입으면서도 분풀이할 생각은 너무도 어이가 없다. 더구나 위에서 수군들의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시어 특별상으로 베 12동(1동은 50필)을 내려 보내시니 그 은혜는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려울 것이다” 고 타이르며, 포목은 재단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정의 명령에 따라 교대로 귀향시켜 쉬게 했다. ‘베 12동’ 은 전라감영에서 왕명을 받아 보낸 것이지 의주에서 온 것은 아니다.

 

※ 《환영장》 1593년 11월 17일 ※
신의 소속 전라좌도 연해안 다섯 고을 다섯 포구에는 전선을 더 만들고 괄군(징병 대상자)을 점검하고 군량을 검열하며 차례차례 나갈 군대를 미리 편성해 두는 일이 제일 긴급한 일이옵니다.

 

그런데 요즘 추위가 한결 더하고 소굴 속에 있는 적은 무찌르기 어려우므로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도 쪽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우도 쪽 중위장 가리포 첨사 이응표 등에게 부하 여러 장령을 검칙하여 파수하여 사변에 대비할 것을 지시해 두었습니다. 또 군졸 중에 특히 오래되어 병든 자들을 교대시켜서 우선 본 도로 데리고 돌아갔다가 검칙하고 진으로 돌아올 계획입니다.

 

앞에서 본 장계와 같은 1593년 11월 17일자의 것인데, 장계의 명칭은 《사로잡은 왜군 포로로부터 듣게 된 왜군의 정황》이다.

 

※ 《금왜소고왜정장》 1593년 11월 17일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남아 있는 흉악한 적들이 연해안으로 물러나와 웅거하고 있는데 오래 묵을 작정인 듯합니다. 또 도망갈 기색도 없으니 그 하는 꼴을 보면 흉악한 꾀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거제의 적들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고 소굴도 더 만들고 포구 깊숙이 배를 대고 수시로 드나드니, 경우에 따라서는 쳐들어 올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견내량 길목으로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켰사온데, 지난 11월 3일 복병장 신의 군관 주부 나대용이 정탐하고 있던 왜인 한 명을 사로잡아 결박을 지어 신에게 보냈기에 심문하였던바, 그 공초 내용은 이러합니다.

 

나대용이 ‘거북선+판옥선단’ 으로 견내량에 복병하고 있다가 왜군 정찰병 한 명을 잡아왔다.

 

※ 《금왜소고왜정장》 1593년 11월 17일 ※
이름은 망고토시이고, 나이는 25살입니다. 작년 12월 중에 조선으로 나온 왜장이 거느린 군사 3천여 명이 패하자 군사 6백 명을 더 뽑아 보낼 때 사수로 뽑혔습니다. 금년 11월 2일 사국(시코쿠)에서 배를 타고 배 8척이 한 떼가 되어 그달 28일 웅천 앞바다에 상륙하여 양산에 이르러 두서너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중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6월 중에 양산, 마산, 밀양 등지의 배 5백여 척이 거제 땅 영등포 · 장문포 · 원포 등지로 옮겨 정박했습니다. 왜장은 여섯 사람인데 각각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등포의 산 위와 성 안, 그리고 장문포와 원포 등에 성을 쌓고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중간 배 100여 척이 11월 4일 병든 왜인을 실어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왜장은 안질 때문에 잘 보지 못하고 또한 왜장은 국왕의 조카이므로 그 배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또 100여 척은 군량을 실어올 일로 그달 27일에 부산포로 갔는데 군량은 본국으로부터 연속해서 실어다가 30여칸 곳간에 채우고도 남았으나 쓰지 않았습니다. 왜의 졸병들은 곳간 밖에 있는 곡식을 형편에 따라 공급하고 있습니다.

 

사로잡혀온 조선 사람 중에 여인은 차례로 들여보내고 남자는 혹은 배를 태워 고기를 잡게 하고 혹은 부산 등지로 드나들며 장사를 해서 살게 하고 선부로도 보충하였습니다.

 

소인은 부하 졸병으로 다른 일은 자세히 모르고 활은 좀 쏠 줄 알기 때문에 처음 본국에서 뽑혀 올 때 조선 싸움에서 공로를 세우면 종노릇을 면할 수 있고 또 금은과 보물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먹는 것은 적었고 일은 번거로워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왜인인 미삼랑과 서로 몰래 약속하기를, 여기서 이렇게 굶주리며 일하는 것은 조선에 항복하는 것만 못하겠다고 말하고 지난 11월 1일 같이 도망하여 풀숲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 진에 있는 왜인이 발자취를 찾아 쫓아와서 미삼랑은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소인은 도망쳐 바로 강변으로 갔다가 마침 굴을 캐고 있던 여인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여인들이 소인을 붙잡고 소리치자 조선 전선이 뜻밖에 달려와서 결박하여 실려 온 것입니다.

 

세 여인이 여자의 몸으로 최일선 지역에서 굴을 캔 것이나 왜병을 포로로 잡은 것이나 대단히 용맹스럽다.

 

※ 《금왜소고왜정장》 1593년 윤11월 17일 ※
“부산 등지의 각 진영 왜장들의 이름은 낱낱이 외우지 못하지만 부산포의 왜장은 종의지이고, 웅포는 조천장정, 김해 · 양산은 과도승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제 사는 정병 김은금, 양가집 여인 세금, 금대, 덕지 등이 왜를 만나 붙잡았던 절차를 심문하여 진술받은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피난민들로서 지난 윤11월 3일 간도(통영군 용남면 해간도) 근처 해변에서 굴을 캐고 있었는데 저 왜놈이 조양역(거제군 사등면 조양리) 쪽에서 달려 나와 섰다 앉았다 하며 주춤거리고 가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합력하여 붙잡아놓고 복병선을 소리쳐 부르자, 복병했던 사람들이 노를 재촉하여 달려와서 결박하여 배에 실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간사한 왜놈이 감히 비밀한 꾀를 내어 수풀 속으로 출몰하면서 우리 편 허실을 정탐하던 형적이 완연한데, 이미 사로잡혔고 제 스스로도 살지 못할 줄은 알므로 우리나라에 항복하려 한다는 말을 핑계하는 것이니 더욱 흉측스러워 잠시도 목숨을 늦추어 줄 것은 아니지만, 참이고 거짓이고 간에, 적들의 형편을 대강 문초하였고 더 추궁하여 물어 볼 것이 있을 것도 같아서 목을 매어 도원수 권율에게 압송했습니다.

 

거제의 양가집 여인 세금 등 3명은 피난 중에 굶주리고 피곤한 여인들의 몸으로서 적을 보고 피하지 않고 힘을 합하여 적을 붙잡아 복병장을 불러서 결박하게 하였으니, 저 소문만 듣고 도망가는 사람들과는 천 번 만 번 다르므로 각별히 타이르고 아울러 양식을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습니다.

 

세 여인의 용맹함을 치하하면서 ‘소문만 듣고 도망가는 사람들과는 천 번 만 번 다르다’ 고 하였는데, 비변사에서는 이 장계를 읽고 속으로는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나 겉으로는 파안대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