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해전기록
※ 《난중일기》 1593년 7월 17일 ※
맑다.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으로부터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다.
이억기의 후방 고을들에도 걱정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 《난중일기》 1593년 7월 28일 ※
맑다. 경상우수사, 충청수사, 본도 우수사가 같이 와서 약속하였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로 갔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서도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곤장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체찰사의 문책하는 공문을 받고 수사들이 모여서 협의를 했다. 그리고 그 회보를 정여흥이 가지고 간 듯하다. 원균의 부하들이 또 못된 짓을 하고 있다. 왜복을 입고 조선 백성들의 목을 베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증거물이 없었으므로 곤장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일 ※
맑다. 새벽 꿈에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모양이 서울 같았다. 영의정과 마주 앉아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려가며 탄식할 적에 적의 형세는 벌써 종식되었다고 하였다. 서로 일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3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는 징조의 꿈이었을까? 이순신은 훗날 백의종군 때에도 통제사로 재임명되기 전날 어떤 임명장을 받는 꿈을 꾸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2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음이 답답하여 닻을 감아 올리고 포구로 나가니 정 수사(정걸)가 따라 나오고 순천, 광양이 와서 보았다. 소비포(이영남)도 왔다. 저녁에 진을 쳤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홍명이 왔다.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말하기를 “방답(첨사 이순신)이 근친(부모님을 뵈러 감)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더라.” 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을 내어보낼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또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 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염이 아픈 데가 곪아서 침을 놓아 째었더니 나쁜 진물이 흘러 나왔는데 며칠만 늦었다면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였다. 큰일 날 뻔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의원 정종지의 은혜가 더할 수 없이 크다.
원균의 망령된 비방에 대해서 별 대응 없이 그저 운수 소관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기에 기록해 두고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는데, 위기관리를 챙기는 오늘날의 CEO의 모습과도 닮았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4일 ※
맑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에 도원수의 군관 이완이 3도에 퍼진 적의 형세를 보고하는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고 군관, 아전들을 잡으려고 진으로 왔다. 우스운 일이다.
권율 도원수부 소속 군관이 각 수영 군관들이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관리들을 잡으러 왔는데, 무언가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권율 도원수부가 발족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던 관계로 예하부대와 행정적으로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 《난중일기》 1593년 8월 ※
5일. 맑다. 조붕, 이홍명, 우수사와 우후들이 와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고 소비포(이영남)도 밤중에 돌아갔다. 아산 이례가 밤에 왔다.
6일. 맑다. 아침에 조카 완이 송한련, 여여충과 함께 도원수에게로 갔다. 식후에 순천, 광양, 보성, 발포, 이응화 등이 와서 보았다.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이억기),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송한련 등이 도원수부로 떠났다. 도원수부와의 손발 맞추기 때문인 것 같고, 그리고 손발 맞추기에 성공했다. 그 후로도 권율과 이순신 간의 손발 맞추기 노력은 성공했다. 당시 복잡하고 믿을 수 없는 정보가 난무하던 때에 두 사람의 손발 맞추기는 전란 수습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원균의 주장에 모순이 있어 개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과도 손발을 맞춰 국난 극복에 기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7일 ※
아침엔 맑더니 저물어선 비가 왔다. 농사에 흡족하다. 당포 만호(하종해)가 작은 배 찾아갈 일로 왔기에 주어 보내라고 사량 만호(이여념)에게 일러주었다. 저녁에 경상 수사(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 하니 믿을 수가 없다.
박치공은 원균의 심복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박치공을 극히 불신하고 있다. 이순신이 불신했던 원균의 심복은 박치공 외에 기효근 등 몇 사람이 더 있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9일 ※
맑다.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고 또 회와 염의 병도 회복되어 간다고 하니 다행이다. 오후에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수사도 왔다. 영남수사는 복병군을 일제히 내어 보냈는데, 복병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해서 먼저 보냈다고 하였다. 해괴한 일이다.
이 무렵부터 원균은 의논도 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전을 폈던 것 같다. ‘해괴한 일’ 이라고 한 것은 이전에는 서로 의논하여 작전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원균은 따로 작전을 한다면서 물에 빠진 시체의 목을 베러 다녔고 그렇게 해서 통제사가 되려고 했던 듯하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3일 ※
본영에서 온 공문을 결재하여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선창 밑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어지럽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모시고 가라고 내어 보냈다. 송두남이 군량미 3백 섬과 콩 3백 섬을 실어왔다.
이 무렵에는 제승당 같은 건물이 없었다. 그래서 비가 오거나 몸이 아플 때는 ‘선창 밑’ 에서 지냈다. 모든 장병들이 그러했기에 고생이 심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5일 ※
맑다. 이날은 추석이라 우수사(이억기), 순천(권준), 광양(어영담), 낙안(신호), 방답(이순신), 사도(김완), 흥양(배흥립), 녹도, 이응화, 이홍명, 좌우도 영공(좌수사와 우수사)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회가 본영으로 돌아갔다.
추석이라 전라 좌우수영 장수들, 그리고 장남 회가 함께 모였다. 이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는데 현지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7일 ※
상선(上船 : 이순신의 기함)을 연기로 그을리기 위해 우별도선에 옮겨 탔다. 늦게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수사도 왔다. 제만춘을 불러 와서 심문해 보니 분한 사연들이 많이 있었다. 종일 의논하고 헤어졌다. 이날 밤 달빛은 낮과 같고 물결은 비단 같았다.
기함의 부식을 막기 위해 연기로 그을리는 작업을 했다. 제만춘을 불러와서 ‘하루 종일’ 일본 사정에 대해 여러 가지 심문해 보았는데, 이날 하루 동안 심문해서 파악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 장계가 9월 14일자의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이 왜의 정황을 보고하는 장계》이다.(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장계를 보면 이순신의 탁월한 정보 분석 능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날 제만춘을 상대로 한 왜적에 관한 정보수집 심문에 이순신 · 이억기 · 정걸은 참석했는데 웬일인지 원균은 불참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8일 ※
맑다. 우수사, 정수사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조붕이 와서 “박치공(원균의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고 하였다.
원균이 올린 장계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해전이 없었기에 이렇다 할 보고사항은 없었겠고, 그간 모은 수급을 올리면서 별도로 해전을 해서 얻은 수급이라 보고하지는 않았을까? 혹은 인사문제를 두고 합의한 것일 수도 있고, 통제사가 되기 위한 ‘로비성 장계’ 였을 수도 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19일 ※
맑다. 아침을 먹은 뒤에 원 수사에게 가서 내 배로 옮겨 타자고 청하였다. 우수사와 정수사도 왔다. 원공(원균)도 같이 이야기하였다. 원공의 형제가 옮겨간 뒤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와 우수사, 정수사와 같이 앉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이순신이 원균을 찾아갔고, 그 자리에 이억기와 정걸이 왔다. 제만춘이 일본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 《난중일기》 1593년 8월 20일 ※
아침을 먹은 뒤에 송희립을 통해 순찰사에게 문안도 하고 또 제만춘을 심문한 공문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방답(첨사 이순신), 사도(첨사 김완)에게 좌우로 패를 갈라, 돌산도 근처로 이사해 와서 사는 자들로서 작당하여 남의 재물을 약탈한 자들을 잡아오라고 내어 보냈다. 저녁에 역량 만호 고여우가 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제만춘 관계 보고서는 전라감영에 보냈고, 감영에서는 권율 도원수에게도 보고했을 것이다. 조정에 보고한 것은 1593년 9월 4일이며 이순신, 이억기, 정걸 등 세 수사의 연명으로 올려졌다. 즉, 원균은 연명에서 빠져 있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26일 ※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순천, 광양, 가리포는 곧 돌아갔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낙안(신호)이, 수길(히데요시)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의 초본과 명나라 사람이 고을에 와서 기록한 것을 보내왔는데, 보니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한다는 소식이 비공식적으로 통고되었던 것 같고, 따라서 원균의 불평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 《난중일기》 1593년 8월 30일 ※
맑다. 원 수사가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25척은 판옥선, 협선, 포작선 등을 합한 숫자 같다. 원균은 그 25척을 이순신 모르게 어디로 보내 놓고, 나머지 7~8척만 이끌고 와서는 불쑥 출동을 제안했다. 상황을 보면 마치 원균이 상관으로 이순신을 자신의 부하 장수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아무튼 원균은 이러한 내용을 장계해서 ‘자신은 늘 나아가 싸우자고 했다’ 고 보고 했던 것 같다.
※ 《이충무공 행록》 ※
7월 15일. 공은 본영이 전라도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해상을 막고 지휘하기가 어려우므로 마침내 진을 한산도로 옮기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도 이를 허락하였다.
그 섬은 거제 남쪽 30리에 있는데 산 하나가 바다 굽이를 껴안아 안에는 배를 감출 수 있고 밖에서는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뿐더러 또 왜선들이 전라도로 가자면 반드시 이 길을 거치게 되는 곳이라 공이 늘 요긴한 길목이라고 하더니, 이때에 여기에다 진을 치게 된 것이다.
그 뒤에 명나라 장수 장홍유가 여기에 올라와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정말로 좋은 진(陣) 터다!” 라고 하였다.
‘본영이 전라도에 치우쳐 있기에… 한산도로 옮기기를 청했다’ 고 하였는데, 4만의 왜군이 견내량 북쪽에 왜성을 많이 쌓고 있었으므로 장기 주둔하면서 왜적을 감시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요지였다. 그러나 원균의 함대만으로는 견내량을 지켜낼 수 없었기에 이 같이 요청한 것이다.
※ 《이충무공 행록》 ※
8월에 조정에서는 3도 수군이 서로 통섭(統攝)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주관하는 장수가 있어야 되겠다고 판단하고는 공으로서 3도수군통제사를 삼고 본직은 그대로 겸하게 하니, 원균은 자기가 선배로서 도리어 공에게 지휘를 받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공은 매양 그를 너그럽게 대해 주었다.
이순신은 조정에 자신의 함대뿐 아니라 이억기 함대와 충청도 함대도 함께 견내량을 막아서야 한다고 건의했고, 조정에서도 3도의 수군이 한산도에서 장기 주둔할 것을 예상하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 《이충무공 행록》 ※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매양 군량 때문에 걱정하여 백성들을 모아 들여 둔전(屯田)을 짓게 하고 사람을 시켜 고기를 잡게 하며 소금 굽고 질그릇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하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모두 배로 실어 내어 판매하여 몇 달이 채 안 되어 곡식을 수 만 섬이나 쌓게 되었다.
둔전, 염전, 도자기, 나전칠기 등 수익성 사업을 관리했다.
※ 《이충무공 행록》 ※
또 공은 진중에 있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매일 밤 잠을 잘 때에도 띠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한두 잠을 자고 나서는 사람들을 불러 들여 날이 샐 때까지 의논하고, 또 먹는 것이라고는 아침저녁 5~6합뿐이어서 보는 이들은 공이 먹는 것도 없이 일에 분주한 것을 깊이 걱정하는 것이었다.
공의 정신은 보통사람보다 갑절이나 더 강해서 이따금 손님과 함께 밤중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고도 닭이 울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혼자 일어나 앉아 혹은 문서를 보기도 하고 또 혹은 전술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것’ 은 신독 관리인데, 이순신은 엄격한 자기 관리에 충실했다. 이렇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에 뛰어났음이 이순신 리더십의 기초이다.
조정에서 이순신을 통제사로 내정한 것은 1593년 8월 15일이고, 이순신이 교지를 받은 것은 1593년 10월 9일이다. 이순신은 그 후 하옥될 때까지 3년 5개월 동안 견내량을 막아서서 왜군들과 대치하는 동시에 ‘3도수군통제영의 창업기’ 를 완성한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삼가 품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방비하는 계책에는 각각 어렵고 쉬운 점이 있사온데, 요즘 사람들이 모두 바다는 어렵고 육지는 쉽다고들 하면서 수군 장수들도 모두 다 육전으로 나가고 바닷가의 졸병들도 또한 육전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지휘 장수로는 이를 제어할 수 없고 전선의 사부와 격군까지도 조정할 길이 없으니, 모든 장수들의 용감하고 용렬함을 무엇으로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수군에 자리 수나 채운 자품으로 여러 번 큰 전쟁을 겪었으므로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과 오늘의 급무를 들어 아래에 약간 진술하는 바이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겁쟁이가 십중팔구요, 용감한 자라고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시에 서로 섞여서 무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내어 놀라 엎어지고 자빠지며 다투어 달아나니 설사 그 속에 용감한 자가 있다 한들 혼자서 어찌 번쩍이는 칼날을 무릅쓰며 죽자고 돌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골라 뽑은 군졸들을 용감하고 지혜 있는 대장에게 맡겨서 정세에 따라 잘 지도하였더라면 오늘날 사변이 이렇게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선비의 나라였고, 또 그 이전 2백 년 동안은 전쟁을 모르고 살아 왔다. 반면에 일본은 전쟁을 업으로 삼아 온 무사(武士)의 나라였고, 그 이전 100년 동안 일본형 전국(戰國) 시대를 거쳐 조선과 중국으로 전쟁을 확산시켰다.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과 360여 고을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며 울면서 도망’ 을 갔다. 이순신은 이 같은 시대상을 맞아 대책을 찾았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장계를 올렸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그런데 해전으로 말하면 많은 군사가 다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설사 도망하려고 해도 어쩔 길이 없기도 하려니와, 노질을 재촉하고 북소리 급히 날 때 만일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군법이 뒤를 따르니 어찌 힘껏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거북선이 앞에서 돌격하고 판옥선이 뒤따라가며 연이어 지자총 · 현자총을 놓고 또 포탄과 화살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은 해전의 쉬운 점이옵니다.
겁쟁이 체질을 감안, 왜란 전에는 호구 조사와 동원훈련 등을 통해 전란이 터졌을 때 도망가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입대한 병사들을 병선에 태우고 군악에 맞추어 ‘노질을 재촉’ 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도망가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즉, 결사전의 각오로 싸울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고, 이 같은 마음가짐에 ‘거북선+학익진’ 의 해전법을 승전의 방법론으로 삼았다.
‘거북선이 앞에서 돌격하고, 학익진의 판옥선단이 뒤따라가면서 공격’ 하면 겁쟁이 조선병사들은 용맹한 사자로 바뀌었고, 사무라이들은 겁쟁이가 되어 울면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그런데 전선의 수가 적고 수군의 졸병들도 달아나는 자들이 요즘에 와서 더욱 많아졌는바, 만일 전선을 많이 준비하고 또 격군을 채울 길이 열린다면 비록 왜적이 수없이 쳐들어 와도 족히 당적해낼 수 있으며 또 족히 섬멸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제 적의 정세를 보건대, 남쪽으로 도망해 내려온 뒤로는 아직도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영남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저희 소굴로 만들고 있는데, 놈들의 하는 짓을 살펴보면 그 흉한 계책을 헤아리기 어렵사옵니다. 만일 적들이 수륙으로 합세하여 일제히 치고 나오면 우리의 약한 수군으로는 그것을 막아내기가 어렵고 또 군량을 대기도 어려울 것이므로, 이것이 자나 깨나 신이 걱정하는 바이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군의 관할 하에 있는 연해안 각 고을의 여러 종류 장정군(壯丁軍)들을 모두 수군에 소속케하고 군량도 또 그렇게 하여 전선을 곱절이나 더 만들게 한다면 전라좌도 다섯 고을 다섯 포구에는 60척을 정비할 수 있고, 우도 열다섯 고을 열두 포구에는 90척을 정비할 수 있습니다.
경상우도에는 난리를 치른 후라 조처할 길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그래도 40여 척은 정비할 수 있고, 충청도에서도 60척은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합하면 250여 척은 될 것입니다.
적이 비록 많다고 해도 그 배는 물 위에 있는 것이니 우리 배가 맞버티면 적들도 이를 꺼려 마음대로 상륙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조정에서는 충분히 헤아리시어, 이 일에 있어서만은 연해안 여러 고을의 장정군들과 군량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모두 수군에 소속시켜 주시고, 수군 장정들의 인사 또한 이동시키지 말기를 바라옵니다.
부산포해전 때는 판옥선 94척, 이듬해인 견내량 봉쇄 작전 때는 ‘100여 척’ 이었기에 250척이면 두 배가 된다. 이 정도면 5백~1천여 척의 왜선단에 대적할 수 있고, 부산 앞바다의 제해권도 완전히 확보할 수 있으므로, 보급로가 끊긴 왜 육군은 큰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250여 척이면 약 4만의 수군력인데, 세종대왕 시대의 수군력이 4만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정의 의지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군사들의 양식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호남 방면이 명색으로는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모든 물자가 고갈되어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본도의 순천 · 흥양 등지 같은 곳은 넓고 비어 있는 목장과 농사지을만한 섬들이 많이 있사오니, 혹은 관청 경영으로 경작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소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 · 흥양의 수비군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사변이 생길 적에는 나가 싸우게 한다면 싸움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이것은 조(趙)나라 이목과 한(漢)나라 조충국이 일찍이 경험한 방책입니다. 다른 도에도 이 같은 예로 명년 봄부터 시작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둔전 경영으로 수군력 배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전선을 두 배나 더 만든다면 지자 · 현자총들을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려울 것이오니 육지 각 고을에 있는 총통들을 급속히 수군으로 옮겨 보내 주어야 하겠습니다.
왜군이 남해안으로 물러났고, 조선 수군은 그 왜군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기에 전국 각 고을의 대포를 수군 쪽으로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전시 행정체제를 구축해 놓지 못한 조정의 형편으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 《조진수륙전사장》 1593년 9월 10일 ※
수사(水使)는 수군의 대장으로서 무릇 호령을 내려도 각 고을 수령들은 관할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면서 전혀 시행치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 두는 일이 많아 일마다 늦어지게 되는바, 이런 큰 난리를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갈 수 없사오니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는 감사와 병사의 예에 의하여 수령을 아울러 지휘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바라옵니다.
전라도에는 육군 병마사(兵馬使) 직이 2개 있었는데, 그 중 1개는 전라감사가 겸직하고 있었다. 또 병마사들은 도 내에 있고, 수사들은 한산도에 나와 있었기에 후방 고을 수령들은 수사보다는 병마사들의 명령에 더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이상에서 살펴본 6개의 수군력 증강계획안은 이순신의 ‘6대 원칙’ 이자 실용적 방안이었다. 그러나 시문놀이 체질의 조정에서는 그 실용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빚었으며, 그 결과 임진왜란의 조기 수습은 계속 멀어져 갔다.
※ 《봉진화포장》 1593년 8월 10일 ※
삼가 올려 보내는 일로 아뢰나이다.
신이 여러 번 큰 전쟁을 통해 왜인의 조총을 얻은 것이 많습니다.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한 이치를 시험하였던바, 몸체가 길므로 총 구멍이 깊고, 또 깊기 때문에 기운이 세어 맞기만 하면 부서지는데, 우리나라의 승자나 쌍혈 등은 총통이 몸체가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그 소리도 크지 못하므로, 신은 항상 조총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한 법을 알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난하여 본영에 와 사는 김해 절 종 동지, 거제 절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꼭 같습니다.
그 구멍에 불을 붙이는 기구가 좀 다른 것 같으나 며칠 안으로 다 마쳐질 것이며, 또한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므로 수군 소속 각 고을과 포구에서 우선 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함과 동시에 한 자루는 전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각 고을에서도 일제히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에 있어 적을 제어하는 무기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므로 정철로 만든 조총 다섯 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내오니, 엎드려 원컨대, 조정에서도 각 도와 각 고을에 명령하여 모두 다 만들게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감독해 만든 군관 정사준과 대장장이 이필종 등에게는 각별히 상을 내리시어 감격하여 열심히 일을 하게 하시고, 또 모두들 서로 다투어 본떠서 만들어 내도록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한 이치를 시험’ 하였다는 말에서, 이치는 격물 · 치지에서 말하는 이치이다.
충무공의 군관과 대장간 천민들이 격물 · 치지 사상을 동도(동양사상)로 삼고 서기의 산물인 조총을 제작했기에 민족사적으로 보면 동도서기(조선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수용 · 접목한다는 대한제국의 세계화 이념)를 실천한 효시적 사례이다.
1627년, 네덜란드 상인인 박연(벨테브레)이 풍랑으로 전라도 해안에 상륙하자 훈련도감에서는 그로 하여금 서양식 총포를 제작케 했다. 이 역시 동도서기론의 적용사례이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있었고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서양 과학의 산물인 천문, 지리, 역법, 대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가져왔다. 1653년 네덜란드의 하멜 등이 표류해 왔을 때 조정은 그들로 하여금 훈련도감에서 총포를 만들게 했다. 1654년 효종 때는 이렇게 제작된 총포류로 무장한 조선군이 청군과 함께 만주 송화강 북쪽에서 러시아 군을 격파했는데 이것이 나선 정벌이다.
정부 차원의 제도적 학문적 동도서기 접목론의 효시는 영조 때의 《동국문헌비고(1770년)》이다. 이 시기에 다산 정약용은 실사구시를 통해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기기도설》에 있는 거중기의 원리를 이용해 수원성을 축성했다. 이것이 다산의 수원성 축성 군영이다.
동도서기는 조선이 광무 개혁(1897~1907)때 내건 세계화 이념(이론)이다. 당시(고종황제 때) 조선은 서기의 창구를 러시아로 삼았는데 이것이 러 · 일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러 ·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을사조약을 강요하면서 ‘조선은 동도서기를 자주적으로 한답시고 외세를 끌어들이지 말 것’ 이라는 조치가 담긴 을사조약을 맺게 했다.
그 대신 화혼서용(일본의 정신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수용 · 접목한다는 일본제국의 세계화 이념), 화혼화용의 보호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승만 · 김구 · 안창호 등의 선각자들은 해외에서, 그리고 김성수 · 유일한 · 이병철 등 조선의 기업인들은 국내에서 기업 내부적으로나마 동도서기를 실천했다.
임진왜란 50년 전, 일본의 대장간에서는 격물 · 치지를 화혼으로 삼고, 서용의 산물인 조총을 제작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명나라는 격물 · 치지를 중체로 삼고, 서구과학의 산물인 불랑기포(유럽제 대포)를 제작해서 임진왜란 때 사용했다.
정리해 보면, 임진왜란을 계기로 동서양의 문물은 무기류를 통해 먼저 접목되었고, 다음으로 안경 · 자명종 · 천리경 · 지구의 등에서 동서가 접목되어 온 것이 임진왜란 후 ‘광수군→소현세자→정다산→최한기’ 등에 이르는 실학자들에 의한 서양과학의 연구 · 수용사이다.
그 후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1868) 때의 화혼서용, 청의 양무운동(1866) 때의 중체서용, 조선의 광무개혁(1897) 때의 동도서기가 국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개된 동서양 접목론이자 동양의 세계화 이론으로 내걸어졌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틀에서는 여전히 같은 틀이다.
오늘날 추석 때 성묘를 가는 마음은 동도(동양사상)이고, 타고 가는 자동차는 서기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90년대에 와서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 것을 지키고 외래의 것을 수용하자’ 는 학술회의가 많이 열렸는데, 그 핵심이 바로 동도서기 이론이다. 그러나 동양 전통의 군영학이 실종되어 있기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