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
“알겠어.”
프랑수아 끄리스띠앙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손에 든 꼬냑 잔을 가볍게 흔들면서 벽난로의 불길을 응시했다.
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떠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녀는 프랑수아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졌고, 그랬기에 창녀처럼 그저 일어나 걸어나옴으로써 그를, 아니 그와 자신을 모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창녀가 아니었으니까.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그들은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각이었고, 포시 가와 빅또르 위고 가 사이의 뽈 발레리 로에 면한 호화로운 아파트의 넓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프랑수아가 아내와 세 아이들이 사는 집을 교외에 한 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에도 두 곳 이상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짐작이 들기는 했지만, 물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또 자기가 그에게 하나뿐인 애인이냐고도 묻지 않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베라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이 된 그의 머리칼은 아직 검었지만, 관자놀이에는 흰 머리카락이 몇 올씩 섞여 있었다. 가는 줄 무늬가 진 검은 양복 차림에, 눈처럼 흰 맞춤 와이셔츠의 소맷부리가 더블 상의 소매 밖으로 알맞게 튀어나온 그의 모습은 타고난 귀족처럼 보였다. 그가 여전히 불길을 응시하면서 멍하니 술을 마시는 동안, 왼손에 낀 결혼 반지가 불빛을 반사시켰다. 그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얼마나 많이 그녀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던가?
그녀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밥띠스뜨 모느레는 해군 고위 장교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베라는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다양한 직책과 근무지를 따라 전세계를 여행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그녀의 아버지는 은퇴하여 독립적인 방위 상담가가 되었고 그들은 남프랑스의 넓은 저택에 영구 정착했다.
당시 국방성 차관이었던 프랑수아 끄리스띠앙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번번히 찾아오는 손님이 된 것은 그곳에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다. 프랑수아는 베라에게 예술과 인생과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어느날 저녁에는 그녀의 학업 방향에 대해서도 얘기했었다. 그녀가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랐던 것이다.
베라는 정말이라고 고집을 세웠다. 사실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뿐만 아니라 의사가 되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기도 했었다. 비록 그것이 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그녀의 아버지에게 했던 당돌한 약속에 불과할지라도 그랬다. 어느 일요일 저녁, 그녀의 부모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여자들에게 알맞는 직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을 때, 그녀는 느닷없이 자기는 의사가 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정말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베라는 자기의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지어 보였던 애매한 미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미소를 그녀는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다. 부모들 중 누구도 그녀가 의사가 될 수 있거나 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자기의 부모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굳힌 순간 그녀 주위로 하얀 빛이 떠오르더니, 환하게 비치며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외엔 아무도 그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빛에서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경험해 보았던 그 어떤 것에서보다도 더 큰 힘을 느꼈던 것이다. 베라는 그것을 자기가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 진실이며, 그녀의 운명이 분명하게 정해졌다는 확인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 프랑수아 끄리스띠앙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똑같은 빛이 다시 나타났고, 베라는 그에게 그 빛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프랑수아는 마치 그녀의 말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격려를 해주었다. 꿈을 따르라고.
스무 살에 그녀는 파리 대학교를 졸업했고, 곧이어 몽뻴리에에 있는 의과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쯤에는 그녀의 아버지도 태도가 누그러져서 그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1년 후, 깔레에서 할머니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뒤에, 베라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들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프랑수아 끄리스띠앙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거의 3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었다.
그것은 물론 인사나 하는 것 외엔 다른 목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장난 삼아 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이제 프랑스 민주당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베라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면회를 요청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뚫고 그와 만날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곧장 그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고 프랑수아가 그녀를 맞기 위해 책상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가 차를 시키고 난 뒤 그들은 사무실 밖의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것은 베라가 열여섯 살 때였지만, 이제 그녀는 스물두 살이 다 되어 있었다. 6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발랄한 10대 소녀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우 지성적이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젊은 여자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태도가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에게서 내내 눈을 떼지 못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랬다. 그것은 베라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날 저녁, 프랑수아는 그녀를 이 아파트로 데려와 저녁 식사를 했었고, 그 다음에는 베라가 지금 이 순간 앉아 있는 벽난로 옆의 소파에서 그녀의 옷을 벗겼었다. 그와의 정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4년 동안, 그러니까 프랑수아가 수상이 된 뒤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폴 오스본이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채 며칠도 안 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좋아.”
그가 의자에서 몸을 돌려 그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담겨 있었다.
“이해해.”
그 말과 함께 그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음 속에다 영원히 그녀의 모습을 새겨 두려는 듯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한참동안 거기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마침내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