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
전화 소리에 그녀는 잠이 깼다. 한동안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스페인 식 정원으로 살짝 열린 미닫이 문을 통해 강한 햇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저 건너 센 강 위로는 오후의 태양이 완강한 구름 틈새로 뚫고 나오기를 포기하고서 구름 뒤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베라는 잠이 덜 깬 채로, 한쪽 팔꿈치를 괴고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녀의 스타킹과 속옷은 침대 밑으로 반쯤 기어들어간 채 바닥에 널려 있었다. 잠시 뒤 정신이 들자 그녀는 자기가 자신의 아파트 침실에 있고,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건너편에서 누군가 자기를 엿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시트로 몸을 가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위?”
“베라 모느레?”
그녀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남자 목소리였다.
“위?”
그녀가 당황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전화선 저편 끝에서 분명하게 짤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폴!”
그녀가 큰소리로 불렀다.
“폴!”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오스본이 가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침대에서 빠져 나와 그녀는 화장대 위의 고풍스러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른쪽으로는 욕실 문이 열려 있었고 배수구와 비데 옆의 바닥에는 쓰고 난 수건들이 널려 있었다. 욕실 커튼은 떨어져 내려서 욕조를 반쯤 가로지른 채 늘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변기 뚜껑 위에 그녀의 구두 한 짝이 올려져 있었다. 지금 누가 그곳으로 들어오더라도 그 아파트 안에서, 침실과 욕실은 물론 그 어디에서건 격렬한 정사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평생 동안 그녀는 지난 몇 시간 전과 같은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온몸이 다 아팠고, 아프지 않은 곳은 쓰라렸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야수와 하나로 얽혔었고, 그러면서 한순간 한순간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완전하고도 철저한 고갈을 통해서 풀려 나지 않는 한 빠져 나갈 길이 없는 원초적인 분노가 육체적 정서적 갈구라는 거대한 불길로 바뀌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을 돌려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비추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스스로 뭔가가 좀 달라진 것 같았지만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호리호리한 몸매, 조그만 젖가슴은 전과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도 엉망으로 헝클어지기는 했지만 변하지는 않았다. 달라진 것은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뭔가가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해를 받은 것에 짜증이 나서 전화기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벨은 계속 울렸고 마침내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위?”
그녀가 냉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잠깐만요.”
어떤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베라! 봉주르(안녕)!”
수화기에서 프랑수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원기왕성했고 당당했다.
전화에 응답을 하려는 참에 그 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베라는 자기에게서 빠져 나간 것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소녀다움이었고, 자기가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경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은 좋건 나쁘건, 절대로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봉주르, 프랑수아.”
마침내 그녀가 응답했다.
폴 오스본은 정오가 약간 지나서 베라의 아파트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 2시에는 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끌리시 가를 따라 렌트한 푸른색 푸조 승용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렌트카 회사에서 내준 거리 지도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그는 마르뜨르 로로 우회전을 한 다음 센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 뒤로 이십 분 동안 그는 진입로와 갓길에서 세 번을 멈춰 섰지만 어느 곳도 적당해 보이지가 않았다.
2시 35분, 그는 강변 도로로 숲이 우거진 길을 지나쳤다가 유턴을 해서 되돌아와 그 길로 접어들었다. 4분의 1마일쯤 그 길을 따라 내려가자, 강의 동쪽 제방과 나란히 달리는 언덕에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외진 공원이 나타났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널따란 평지에 지나지 않는 공원과 그 주변을 둘러싼 황톳길뿐이었다. 오스본은 그 길이 다시 고속도로 쪽으로 돌아가는 곳까지 차를 몰아갔다가 찾고 있던 곳을 보았다. 물가로 이르는 흙과 자갈로 된 비탈길이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서 그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고속도로는 거기에서부터 반마일은 족히 떨어져 있었고, 나무들과 그 밑에서 빽빽이 자란 풀들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여름 같았으면 강 가까이에 있는 그 공원이 사람들로 붐볐겠지만, 10월의 비 오는 목요일 오후 3시경에는 인적이 완전히 끊겨 있었다.
차를 세워 두고, 오스본은 그 비탈길까지 걸어가서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로 강이 겨우 보일 듯 말 듯 했다. 어두운 하늘과 가랑비가 모든 것을 가리고 있어서, 마치 이 세상에 그 하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탈길은 가팔랐고, 조그만 보트들의 선착장임이 분명한 아래쪽 부두로 내려가기 위해 그 길을 이용했던 차들 때문에 여기저기 바퀴 자국이 패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경사는 점점 더 완만해졌다. 오스본은 물가에 썩어가는 말뚝들이 일렬로 놓인 것을 보고, 그곳이 여러 해 전에는 강으로 이르는 훨씬 더 큰 입구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무슨 이유로,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있었는지 알 사람이 누구일까? 얼마나 많은 군대가, 얼마나 여러 세기에 걸쳐 이 길을 지났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걸었을까?
물가로부터 10여 피트쯤 떨어진 곳에서 자갈이 회색빛 모래로 바뀌었다가, 물가에 이르면서는 곧장 붉은 진흙으로 바뀌었다. 오스본은 발을 내디뎌 굳은 상태를 시험해 보았다. 모래는 그의 무게를 지탱했지만 진흙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신발이 그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운동화에 묻은 흙을 최대한 털어 낸 다음,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센 강이 물가 쪽으로 작은 파도를 넘실넘실 밀어 보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30야드가 약간 못 미치게 떨어진 곳에서는 바위와 나무로 된 돌출물이 불쑥 솟아 흐름이 급격히 바꾸었다가 본류로 흘려 보내고 있었다.
오스본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는, 선착장을 지나 물가에서부터 솟아오른 언덕으로 건너갔다. 그 언덕 기슭에는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었다. 얼마쯤 뒤에 그가 큼직한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고 되돌아와서 그것을 물에 던져 넣었다.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나뭇가지는 그 자리에서만 떠돌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것이 물살에 쓸려 천천히 하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몇 초 뒤에는 나무들이 서 있는 쪽으로 떠밀려 갔다가 본류 쪽으로 떠내려갔다.
오스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나뭇가지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힘센 물살에 잡히기까지는 십 초가 걸렸다. 그리고 바위와 나무들로 된 돌출물을 빙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이십 초가 더 걸렸다. 그가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을 때부터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모두 해서 삼십 초 가량이 걸린 셈이었다.
그는 다시 선착장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저편 숲으로 건너갔다. 뭔가 더 무거운 것, 까나락의 체중에 좀더 근접하는 물체를 찾아볼 셈에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뿌리가 뽑혀 죽은 나무 둥치를 하나 찾아내어 단단히 움켜쥔 다음, 번쩍 들어 올려서 물가로 날라왔다. 그리고 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서서 그것을 물에 던져 넣었다. 잠시 동안 그 둥치는 나뭇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에 떠 있었지만, 다음에는 물살에 밀려 강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돌출물을 지나 흐름이 바뀌는 곳에 이르자, 빠르자 꾸준하게 본류 쪽으로 떠내려갔다. 한 번 더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강심에 이르러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삼십이 초가 걸렸다. 그 나무 둥치는 적어도 50파운드 이상은 되었고, 까나락은 아마 180파운드 정도쯤 될 것이었다. 나뭇가지와 나무 둥치의 무게 비율은 나무 둥치와 까나락의 무게비율보다 훨씬 더 컸지만, 그 두 물체가 물살에 휩쓸려 본류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같았다.
그 일에 대한 현실성이 굳어지기 시작하자, 오스본은 맥박이 빨라지고 겨드랑이에 땀이 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은 생각대로 잘 될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엔 옆 걸음질을 치다가 다음엔 돌아서서, 그는 서둘러 강둑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 땅이 강심 쪽으로 가장 멀리 돌출해 있는 곳까지 가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물이 깊고, 장애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로막을 것이 전혀 없다면, 썩시닐콜린의 효과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까나락은 물살에 잡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나무 둥치처럼 떠내려갈 것이었다. 그의 몸뚱이가 강심에 이르러 센 강의 본류에 휩쓸리기까지는, 선착장에서 떠밀리기 시작한 뒤 채 육십 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그는 확인해야 했다.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면서 그는 관목 덤불과 수풀 사이로 강을 따라 반 마일쯤을 더 가보았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둑은 점점 더 가팔라졌고, 둑 사이에서 흐르는 물살은 점점 더 빨라졌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그는 멈춰 섰다. 강은 그의 눈길이 미치는 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조그만 섬도, 모래톱도, 붙잡을 수 있는 죽은 나뭇가지도 없었다. 더군다나 거기에는 마을도, 공장도, 집도, 다리도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한, 물에 떠내려오는 물체를 볼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특히 그 일이 비가 내리는 밤중에 벌어진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