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
“어째선지 얘기해 봐!”
앙리 까나락은 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못 가누거나 혀가 꼬부라져서 이치에도 닿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을 정도로까지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취해야 했기 때문에 취했고 그럴 밖에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정이 되기 30분쯤 전, 까나락은 오를레앙 문(門) 근처에 있는 아그네스 당블롱의 조그만 셋집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몽뜨루즈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차로 채 십분 거리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그는 미셸에게 전화를 걸어, 제과점 주인, 르벡 씨가 분점(分店)을 내려고 생각중인 부지를 둘러보기 위해 루앙으로 갈 예정인데 함께 가자는 요청을 받았다고 둘러댔었다. 갔다 오려면 하루나 이틀쯤 걸리게 될 거라면서…
미셸은 기대에 부풀었다. 그 말은 앙리가 마침내 승진을 하게 된다는 뜻일까? 또 만일 르벡 씨가 루앙에다 분점을 낸다면 앙리에게 그 제과점을 맡아 운영해 달라고 그러려는 걸까? 그들은 루앙으로 옮겨가게 될까? 파리의 법석대는 광기로부터 뚝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는 거칠게 대꾸를 하고 나서 자기가 아는 거라곤 함께 가자는 말을 들은 것뿐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그네스 당블롱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어쩌면 그 미국인은 당신을 알아보고서 당신을 찾아내려고 사설 탐정을 고용했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이제 그 탐정이 가게로 찾아왔었고 그 멍청한 계집애가 그 자에게 고용인 명단을 내준 이상, 우린 그 자가 당신을 찾아냈거나 곧 찾아낼 거라고 가정할 수 있어요. 또 그 자가 틀림없이 그 미국인에게 알렸을 거라는 것도요. 좋아요, 그렇다고 가정해 봐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앙리 까나락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술을 한 잔 더 따르려고 방을 가로지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미국놈이 어떻게 나를 알아볼 수 있었느냐 하는 거야. 그놈은 나보다 열두어 살 아니,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아래였어. 나는 25년 동안 미국을 떠나 있었고. 캐나다에서 15년, 여기서 10년…”
“앙리, 어쩌면 그건 실수일 수도 있어요. 그 자가 다른 누구를 당신으로 잘못 봤을지도 모르잖아요.”
“잘못 봤을 리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죠?”
까나락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눈길을 돌렸다.
“앙리, 당신은 프랑스 시민이에요. 그리고 여기선 아무 짓도 하지 않았구요. 당신이 살아온 중에서 이번만은 법률이 당신 편에 있어요.”
“그 자들이 나를 찾아냈다면 법률은 아무 소용도 없어. 그게 만일 그 자들이라면 난 죽은 목숨이야, 당신도 그걸 알잖아.”
“그럴 리가 없어요. 앨버트 메리맨은 죽었어요. 당신이 아니라요.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누가 당신과 연관을 지을 수 있죠? 더군다나 당신이 미국을 떠났을 때는 기껏해야 열 살이나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던 사람이 말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그놈이 무슨 이유로 나를 쫓아왔지?”
까나락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가 겁을 내고 있는지, 화가 나 있는지, 아니면 그 두 가지 다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 자들은 당시의 내 얼굴 사진을 가지고 있어. 경찰도 그걸 가지고 있고, 그 자들도 그걸 가지고 있어. 게다가 나는 별로 많이 변하지도 않았고, 그 어느 한쪽에서 나를 찾아내려고 그 자를 보냈을 수도 있어.”
“앙리.”
아그네스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는 생각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왜 죽은 사람을 찾으려고 들죠? 또 그렇다고 쳐도 왜 여기서 그럴려고 하죠? 당신은 그 자들이 길거리에서 당신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믿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시로 그 남자를 보내고 있다는 건가요?”
아그네스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요. 자, 이리와서 내 옆에 앉아요.”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기 옆의 낡은 소파를 두드렸다.
그녀의 애틋한 눈길, 애정 어린 목소리가 까나락에게 그녀가 지금처럼 매력이 없지는 않았던 옛날을 떠올려 주었다. 여러 해 전부터 그녀는 바로 그런 이유로, 까나락이 더 이상 자기에게 끌리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자신을 가꾸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기를 원하지 않도록 그가 자기의 침대로 들어오는 것도 거절했었다. 그는 완전히 잊혀져 프랑스 문화에 흡수되고 프랑스 사람이 되여야 했다. 그럴려면 그는 프랑스 인 아내를 얻어야 했고, 그 일이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그네스 당블롱이 더 이상 그의 삶에 끼여들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꼭 한 번, 그가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제과점에 일꾼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르벡 씨를 설득했었을 때에만 그의 삶에 다시 끼여들었었다. 그 이후로 그들의 관계는 지금처럼, 적어도 까나락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그네스로서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 역시 까나락을 받아들여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를 살리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모두 처리했던 것도 그녀였다. 까나락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도록 도와주고, 그의 아내인 척 가장해서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들어가고, 그의 가짜 여권을 마련하고, 마침내는 몬트리올을 떠나 그녀의 친척들이 있는 프랑스로 가서 영원히 잊혀질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기까지… 아그네스는 그를 다른 여자에게 넘겨주기까지 하면서 그 일을 모두 처리했었다. 그것은 오로지 그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네스, 내 말 잘 들어.”
까나락이 그녀 옆으로 와 앉는 대신 방 한가운데 서서, 이제는 손에 술잔을 들지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밖에서 차들이 오가는 소리도, 아래층에서 말다툼을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잠시 아래층에 사는 부부가 아마도 그날 밤은 끊임없는 말다툼을 그만두고 영화라도 보러 간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러 날 전에 깎았어야 할 길고 들쭉날쭉한 손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그네스.”
그가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알아내야 돼. 내 말 알아듣겠어?”
그가 물었다.
한참 동안 그녀는 계속 자기의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보지 않고서도 그러리라고 알고 있었듯이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사라진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 서려 있었다.
“우린 알아내야 돼.”
“즈 꽁쁘랑(알겠어요).”
그녀가 웅얼거리고 나서 다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즈 꽁쁘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