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파리 지점장 앙드레 베르네는 은행 건물의 호화로운 위층에 살고 있었다. 풍족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베르네는 항상 생루이 강변의 아파트를 갖는 게 꿈이었다. 이곳에서는 그저 졸부들이나 만날 수 있지만 거기에서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을 사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르네는 늘 자신에게 말했다.
‘은퇴하면, 지하실을 희귀한 보르도 산 포도주로 가득 채워 놓고, 프라고나르와 부세의 그림으로 응접실을 꾸며야지. 그리고 라탱 지구에서 희귀한 고서들과 골동품 가구를 수집하며 나날을 보내는 거야.’
오늘 밤 지점장은 겨우 6분 30초 전에 일어났다. 베르네는 은행의 지하 복도로 서둘러 내려갔지만, 개인 재단사나 미용사가 방금 단장을 해준 것처럼 그의 모습에서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실크 양복을 입은 베르네는 걸어가면서, 입 안에 구강제 스프레이를 뿌리고 넥타이를 단단하게 맸다. 다른 시간대에서 날아오는 국제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에 익숙한 베르네의 수면 습관은 마사이 부족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마사이 부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전투 태세로 돌입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전투는 준비됐다.’
오늘 밤에 어울리는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황금열쇠를 가진 손님은 항상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황금열쇠의 주인이 사법경찰이 찾고 있는 인물이라면 극도로 미묘한 문제였다. 은행은 고객이 범죄자라는 증거가 없을 경우에, 고객의 개인적인 권리에 대한 사법 당국의 법 집행을 막아낸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오 분 남았군.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이 사람들을 은행 밖으로 몰아내야 해.’
베르네는 속으로 말했다. 재빨리 움직인다면, 이 재앙을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네는 경찰에게 보고한 대로 도망자들이 은행으로 걸어 들어왔지만, 계좌 번호도 갖고 있지 않았고 고객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보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빌어먹을, 그 경비원이 인터폴에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시간당 15유로를 받는 경비원에게 사리분별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어휘였다.
문가에 선 베르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 뒤에 억지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잠긴 문을 열었다. 베르네는 따뜻한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방으로 들어갔다. 베르네의 눈동자는 그의 고객을 찾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앙드레 베르네입니다. 어떻게 도와…”
마지막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렸다. 자기 앞에 있는 여자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기대하지 않은 방문객이었다.
“미안합니다만,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소피가 물었다. 그녀는 이 은행가를 알지 못했지만, 남자는 잠시 유령이라도 본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는… 모릅니다. 우리 은행 서비스는 익명입니다.”
지점장은 말을 더듬었다. 그런 뒤 크게 숨을 내쉬더니, 억지로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직원이 말하길, 황금열쇠를 가지고 계시는데 계좌번호가 없다고요? 그 열쇠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제게 주셨어요.”
소피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남자가 더욱 불편해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정말입니까? 손님의 할아버님이 손님에게 열쇠는 주었는데, 계좌번호는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늘 밤 살해되셨거든요.”
그녀의 말은 흥행가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공포를 가득 담은 눈으로 은행가가 물었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죽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충격으로 뒤로 물러선 사람은 소피였다.
“할아버지를 아세요?”
앙드레 베르네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탁자 끝에 몸을 기댔다.
“자크와 난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밤에요. 루브르 박물관에서요.”
베르네는 가죽 의자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베르네는 랭던을 올려다본 뒤 다시 소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든 소니에르의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소피가 선언하듯 말했다.
베르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느라 말을 멈췄다.
“당신들 사진이 인터폴에서 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당신을 알아본 겁니다. 당신들은 살인혐의로 수배중이예요.”
소피는 침울해졌다.
‘파슈가 벌써 인터폴을 돌려?’
파슈는 소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 같았다. 소피는 재빨리 베르네에게 랭던이 누구이며, 오늘 밤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했다.
베르네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소니에르가 죽어 가면서 당신에게 랭던 씨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겁니까?”
“예, 그리고 이 열쇠도요.”
소피는 베르네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시온의 봉인이 찍힌 면을 아래로 해서 열쇠를 내려놓았다. 베르네는 열쇠를 응시했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소니에르가 오직 열쇠만을 당신에게 남겼습니까? 다른 것은요? 종이 한 장도 없습니까?”
소피는 자신이 급하게 루브르를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암굴의 마돈나>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뇨. 그냥 열쇠만 있었어요.”
베르네는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열쇠는 열 자리로 된 계좌번호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열 자리 번호는 암호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번호가 없으면 열쇠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열 자리 숫자.’
소피는 마지못해 숫자 결합을 계산해 보았다.
‘무려 천억 개의 숫자 조합이 가능한 거로군.’
설사 DCPJ의 강력한 병렬컴퓨터를 가져온다고 해도, 이 코드를 깨려면 몇 주가 걸릴 판이었다.
“베르네 씨. 확실히 이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당신이 우리를 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미안합니다.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고객들은 안전 경로를 통해서 자기들만의 계좌번호를 고릅니다. 그 번호는 오직 고객과 컴퓨터에게만 의미가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의 안전까지도요.”
소피는 베르네의 말을 알아들었다. 동네 편의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스위스 은행도 분명히 누군가가 금고 열쇠를 훔쳐와서, 은행 직원을 인질로 붙잡고 계좌번호를 말하라고 요구당하는 그런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을 터였다.
소피는 랭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열쇠를 내려다보다가 베르네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여기 은행에 무엇을 보관하고 있었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무엇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것은 안전금고 은행의 기본 규칙이기도 합니다.”
소피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베르네 씨, 저희들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려고 해요.”
그녀는 손을 뻗어 열쇠를 뒤집었다. 시온의 문장을 드러내 보이며 소피는 남자의 눈을 살폈다.
“이 열쇠의 상징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베르네는 붓꽃 문장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니오. 하지만 우리의 많은 고객들은 자신의 열쇠에 회사 로고나 이니셜 등을 새겨 넣기도 합니다.”
소피는 여전히 베르네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 상징은 시온 수도회라고 알려진 비밀조직의 상징이예요.”
베르네는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모르는 얘깁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내 친구였지만, 우리는 주로 사업 얘기를 했습니다.”
지점장은 넥타이를 고쳐 맸다. 그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소피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네 씨, 할아버지는 오늘 밤 제게 전화해서, 할아버지와 제가 큰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어요. 제게 뭔가 줄 것이 있다고도 했고요. 그리고 이 은행의 열쇠를 주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당신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뭐든지 도움이 될 겁니다.”
베르네는 땀을 닦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경찰이 곧 도착할 거예요. 은행의 경비원이 인터폴에 연락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소피는 무척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
“할아버지는 제 가족에 얽힌 진실을 제게 얘기해 줄 필요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가씨, 당신 가족은 당신이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미안해요. 당신 할아버지가 당신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멀어져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그를 고통스럽게 했는지 소니에르는 여러 차례 얘기했지요.”
소피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랭던이 물었다.
“계좌의 내용이 상그리엘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베르네는 랭던에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바로 그때, 베르네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베르네는 허리띠에서 전화를 잡아 뺐다.
“네?”
베르네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베르네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근심으로 변해갔다.
“경찰? 이렇게 빨리?”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프랑스어로 뭔가를 짧게 지시했다. 그리고 1분 안에 로비로 올라가겠노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베르네는 소피를 향해 돌아섰다.
“경찰이 평소보다 빨리 움직이는군요.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소피는 빈손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경찰에게 우리가 왔다가, 벌써 갔다고 얘기해 주세요. 은행을 수색하고 싶어하면 수색영장을 요구하세요. 그럼 시간을 좀더 벌 수 있을 거예요.”
“이봐요. 자크는 내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은행은 이런 종류의 압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 면전에서 당신들이 체포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게 시간을 좀 주세요. 경찰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당신들이 은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은 나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어요. 일을 처리하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베르네는 서둘러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안전금고는? 그냥 떠날 수는 없어요.”
소피가 소리쳤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문 밖으로 서둘러 나가면서 베르네가 말했다. 소피는 잠시 베르네를 눈으로 뒤쫓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수년 간에 걸쳐 보낸 그 많은 편지나 꾸러미들 속에 계좌번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자신이 뜯지도 않고 버려둔 편지들 속에 말이다.
랭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소피는 랭던의 눈이 예기치 못한 만족감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로버트? 당신 웃고 있네요?”
“당신 할아버지는 천재요.”
“뭐요?”
“열 자리 숫자.”
랭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소피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소피에게 익숙한,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랭던의 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좌번호 말이오. 당신 할아버지가 결국엔 그 번호들을 우리에게 남겼다고 확신하오.”
“어디에요?”
랭던은 범죄 현장을 찍은 사진을 꺼내서 탁자 위에 펼쳤다. 소피는 첫 줄만 읽고서도 랭던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열 자리 숫자.”
현장 사진을 내려다보면서, 소피의 암호 감각이 꿈틀거렸다.
13-3-2-21-1-1-8-5
‘할아버지는 루브르 박물관 바닥에 계좌번호를 남긴 거야!’
소피가 바닥에 휘갈겨쓴 피보나치 수열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숫자의 유일한 목적은 DCPJ가 암호 해독가를 부르게 해서 소피를 사건에 끌어들이려는 것으로만 알았다. 좀 지나서는 이 숫자들이 다른 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단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의미 없는 순서… 숫자로 된 아나그램.’
이제 놀랍게도, 이 숫자들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숫자들은 할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안전금고 상자를 여는 마지막 열쇠가 될 것이 확실했다.
랭던을 향해 돌아서며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중 의미의 대가였어요. 할아버지는 여러 겹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했지요. 암호에 숨겨진 또 다른 암호 같은 것 말이예요.”
랭던은 이미 컨베이어 벨트 근처에 있는 전자 계기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피는 사진을 움켜쥐고 따라갔다. 계기판은 은행은 ATM 기계와 유사한 키보드를 가지고 있었다. 화면에는 은행의 로고인 십자가가 떠 있고, 키보드 옆에는 삼각형의 구멍이 있었다. 소피는 망설이지 않고 열쇠를 구멍에 집어 넣었다.
화면이 즉시 바뀌었다.
계좌번호:------------
커서가 깜박거렸다. 입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자리’
소피가 사진을 보며 숫자를 읽었고, 랭던이 차례로 입력했다.
계좌번호 : 1332211185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자, 화면이 새롭게 바뀌었다.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메시지가 나타났다. 영어가 제일 먼저였다.
주의 : 엔터 키를 누르기 전에, 계좌번호가 정확한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손님의 비밀 보장을 위해서 만일 컴퓨터가 계좌번호를 인식하지 못할 경우, 이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꺼집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소피가 말했다.
“기능이 멈춘다. 오직 한 번만 시도할 수 있게 돼 있는 것 같군요.”
은행의 일반 ATM 기계들은 고객의 카드를 먹어버리기 전에, 코드를 입력할 수 있는 기회를 사용자에게 세 번 준다. 하지만 이 안전금고의 시스템은 평범한 은행 기계와는 분명히 달랐다.
랭던은 자기가 입력한 숫자와 프린트를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서 결정했다.그리고 엔터 키를 가리켰다.
“숫자가 맞는 것 같소. 누릅시다.”
소피는 검지손가락을 키보드로 내밀었으나 망설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해요. 베르네가 곧 돌아올 거요.”
랭던이 재촉했다. 소피는 손을 뒤로 잡아 뺐다.
“아니에요. 이건 맞는 번호가 아니예요.”
“맞는 번호요! 봐요. 열 자리잖소. 다른 게 또 뭐가 있겠소?”
“너무 무작위로 보여요.”
‘너무 무작위로 보인다고?’
랭던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은행은 고객에게,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암호를 무작위로 고르라고 충고한다. 분명 이 은행의 고객들도 계좌번호를 무작위로 고르라는 충고를 들었을 것이다.
소피는 방금 입력한 숫자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랭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엔 확신이 있었다. 랭던은 소피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소피는 이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로 재정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수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소피는 다시 키보드 앞에 서서 ,마치 뭔가를 기억해 내는 것처럼 다른 숫자를 입력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암호와 상징을 사랑하는 분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쉽게 기억할 수 있고, 또 할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번호를 골랐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해요. 무작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그녀는 숫자 입력을 마치고, 은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랭던은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계좌번호: 1 1 2 3 5 8 1 3 2 1
숫자를 보고, 랭던은 즉시 소피가 옳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보나치 수열.’
피보나치 수열이 열자리로 변형되자, 시각적으로는 수열을 인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기억하기는 쉽지만 무작위로 보인다.’
이 훌륭한 열자리 숫자를 소니에르는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루브르 박물관 바닥에 휘갈겨쓴 숫자들이 왜 유명한 수열로 전환될 수 있는지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소피는 손을 뻗어 엔터 키를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들 밑에 있는 은행의 지하 저장실에서는 로봇 발톱이 움직이며 기지개를 폈다. 천장에 붙은 두 개의 축을 따라 미끄러지며, 발톱은 적절한 대상을 찾아 움직였다. 아래 시멘트 바닥에는 동일한 모양의 플라스틱 상자 수백 개가 거대한 격자 모양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마치 교회의 지하 납골당 안에 작은 관들이 열을 지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한 지점에서 발톱이 윙윙 소리를 내며 멈추고, 로봇 발톱이 아래로 내려와 상자 위에 있는 바코드를 전자장치로 확인했다. 정확하게 들어맞자, 발톱은 상자의 무거운 손잡이를 붙잡고 수직으로 상자를 들어올렸다. 발톱은 상자를 지하실의 한쪽 면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 있었다. 회수용 팔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상자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일단 팔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컨베이어 벨트가 윙윙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피와 랭던은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컨베이어 옆에 서서, 그들은 공항의 수하물 창구에서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상한 가방을 기다리는 여행객이 된 기분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그들의 오른쪽 벽에 난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금속 문이 젖혀지더니,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깊숙이 실려 나타났다. 상자는 주형을 떠서 만든 검은색으로 이음새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상자는 소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상자는 그들 앞에까지 와서 멈춰 섰다. 랭던과 소피는 수수께끼 상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바코드, 금속 고리에 묵직해 보이는 손잡이까지 이 은행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치밀해 보였다. 소피는 상자가 연장 도구함처럼 보였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소피는 앞에 보이는 두 개의 걸쇠를 풀었다. 그러고서 랭던을 응시했다. 둘은 함께 무거운 상자 뚜껑을 들어서 뒤로 젖혔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 소피는 상자가 비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뭔가를 보았다. 상자 바닥에 물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신발상자 크기의 광택이 흐르는 나무상자는 화려한 경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재질은 단단해 보였고, 빛깔은 우아한 짙은 자주색이었다.
‘장미목이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거였다. 상자 뚜껑에는 장미 디자인이 아름답게 상감되어 있었다. 소피와 랭던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소피는 몸을 기울여 상자를 들어올렸다.
‘세상에, 아주 무겁잖아!’
소피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탁자로 옮겼다. 랭던은 그녀 곁에 서서, 그들이 회수한 작은 보물상자를 바라보았다. 랭던은 찬탄하는 마음으로 수작업으로 새겨진 상자의 무늬를 응시했다. 다섯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였다. 그는 이런 형태의 장미를 수도 없이 보았다. 랭던은 속삭였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는 성배를 나타내는 상징이오.”
소피는 랭던을 쳐다보았다. 랭던은 소피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 성배의 상징이 새겨진 뚜껑 등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오직 한 가지 결론만을 암시하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그리스도의 잔이 들어 있다.’
랭던은 다시 한 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완벽한 크기예요. 잔이… 들어가기에 말이예요.”
소피가 속삭였다.
‘성배가 잔일 리 없어.’
소피가 상자를 끌어당겨 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상자를 당길 때, 안에서 뭔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랭던은 뒤늦게 깨달았다.
‘안에 액체가 들어있는 건가?’
소피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방금 그 소리 들었어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액체요.”
손을 내밀어, 소피는 천천히 걸쇠를 풀고 뚜껑을 올렸다.
안에 든 물체는 랭던이 지금까지 봐온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잔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