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간돌포 성 밖에서는, 차가운 산 공기의 상승 기류가 벼랑을 타고 넘어와 피아트에서 내리는 아링가로사 주교에게 냉기를 안겼다.
‘사제복 위에 뭘 더 껴입을걸 그랬군.’
반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주교는 생각했다. 어쨌든 오늘 밤 아링가로사가 보여야 할 태도는 약하고 두려움에 찬 모습이었다. 꼭대기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제외하면 성은 어둡고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서관이군, 깨어서 기다리고들 있는 모양이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링가로사는 돔 모양의 관측소를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문에서 주교를 맞이한 사제는 졸려보였다. 사제는 다섯 달 전에 아링가로사를 맞이한 그 사람이었지만, 오늘 밤은 그다지 공손해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제의 표정에는불쾌함이 역력했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교님.”
“미안합니다. 요즘 비행기는 워낙 믿을 수가 없어서.”
사제는 들리지 않게 뭐라고 중얼거린 뒤 말했다.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도서관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나무로 된 거대한 사각형 방이다. 모든 벽에는 장서들이 빽빽이 꽂힌 책장들이 솟아 있었다. 바닥은 가장자리가 검은 현무암으로 장식된 호박색 대리석이었는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 건물이 한때 궁전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
방을 가로질러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방안의 조명이 너무 어두웠다. 아링가로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듯 환했다.
‘긴장된 밤이 시작되었군.’
오늘 밤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발설하려는 것에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어둠에 앉아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 뒤인 방 끝에서 세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운데 앉은 남자의 형체는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바티칸 시티에서 모든 법적인 문제들을 총괄하는, 몹시 뚱뚱한 바티칸 서기관이었다. 나머지 둘은 높은 자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추기경들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도서관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에 늦어 죄송할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어서, 여러분들께서는 필시 피곤하시겠습니다.”
거대한 배 위에 손을 포개면서 서기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주교가 이곳까지 와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작 한 일이라곤 일어나서 당신을 만나는 일뿐인데요, 뭘. 커피나 다른 마실 것을 갖다드릴까요?”
“사교적인 방문인 척하지 않는 것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잡아 타야할 다른 비행기가 또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이시는군요.”
서기관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을 텐데요.”
“다섯 달 전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심을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링가로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주교의 빠른 행보가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아링가로사의 눈이 긴 탁자를 따라가다가 커다란 검은색 서류가방에 멎었다.
“저게 제가 요구한 것입니까?”
서기관의 목소리는 불편했다.
“그렇소. 하지만, 우리가 그 요청에 대해서 염려하고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소. 그것은 아주…”
“위험해 보입니다.”
추기경 중 한 명이 서기관의 말을 끝맺었다.
“어딘가로 전송해 드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금액입니다.”
‘자유란 비싼 법이지.’
“제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신이 저와 함께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금액은 제가 요구한 대로 정확하겠죠?”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티칸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 채권이오. 세계 어디에서나 현금으로 바꿀 수 있소.”
아링가로사는 탁자 끝으로 걸어가서 서류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두꺼운 채권 뭉치 두 다발이 들어 있었다. 각각의 채권에는 바티칸 문장과 ‘포르타토레’라는 타이틀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것이 채권을 소지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현금과 상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서기관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교, 이 말을 꼭 해야겠소. 만일 이 돈이 현찰이라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걱정스럽지는 않을 거요.”
‘내가 그 많은 현금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가방을 닫으며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채권도 현금처럼 쓰일 수 있다. 바로 서기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추기경들은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채권들은 곧장 바티칸 은행으로 추적됩니다.”
아링가로사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 점이 바로 스승이 아링가로사에게 돈을 바티칸 은행의 채권으로 받으라고 지시한 이유였다. 이 채권은 보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한배를 탄 거야.’
“이 일은 합법적인 거래입니다. 오푸스 데이는 바티칸 시티의 개인적인 분과입니다. 교황은 어떻게 하든 돈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링가로사는 변호했다. 서기관이 몸을 앞으로 내밀자, 그 몸무게를 못 이겨 의자가 삐걱거렸다.
“맞소, 하지만… 당신이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소. 만일 이 돈이 불법적인 일에 쓰인다면…”
“서기관님이 제게 묻고 계신 것을 고려해 볼 때, 제가 이 돈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겠지.’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제가 서명해야 할 것을 가지고 오셨겠지요?”
그들은 아링가로사 앞으로 서류 한 장을 열성적으로 내밀었다. 아링가로사가 그저 조용히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링가로사는 앞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거기엔 교황의 문장이 있었다.
“제게 보낸 서류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서류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링가로사는 놀랐다. 하지만 앞에 있는 세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고맙소. 주교. 교회에 대한 당신의 봉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오.”
서기관이 말했다.
서류 가방을 집어들며 아링가로사는 그 무게에서 권위와 약속을 느꼈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주교?”
추기경 한 명이 문지방에 다다른 아링가로사를 불렀다. 아링가로사는 멈칫하며 돌아섰다.
“네?”
“여기서 어디로 가십니까?”
아링가로사는 그 물음이 지정학적 물음이라기보다는 영혼과 관련된 물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멸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파리로 갑니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스위스 숫자 계좌의 전통 안에서, 익명의 서비스를 현대적으로 제공하는 24시간 운영제의 안전금고 은행이다. 취리히, 콸라룸푸르, 뉴욕 그리고 파리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취리히 은행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익명의 컴퓨터 코드로 된 미완날인증서 서비스와 디지털화 된 백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은행의 주요 업무는 지금까지도 가장 오래되고 간단한 익명의 안전금고 상자의 제공이다. 고객은 주식 증서에서부터 고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든 익명을 보장받고 소유물을 맡길 수 있었다. 사생활을 보호하는 고도의 기술로 이루어진 차단장치를 통해서, 고객은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언제든지 물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소피는 목적지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랭던은 타협의 여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건축물을 내다보았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유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확고한 인상을 주었다. 창문 하나 없는 건물은 전체가 강철로 주조된 듯한 느낌이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은 5미터 크기의 번쩍거리는 네온 십자가를 정면에 단 채 길에서 물러나 앉아 있었다.
비밀 엄수를 고수하는 스위스 은행의 명성은 스위스의 가장 돈이 되는 수출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설비가 예술계에서는 시빗거리가 되고 있었다. 훔친 미술품을 숨길 수 있는 완벽한 장소를 은행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치된 물품은 사생활 보호법에 따라 경찰 수사에서도 보호받았고, 사람의 이름 대신 숫자로 된 계좌만 붙어 있기 때문에 도둑들은 훔친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자기들이 결코 추적당할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물 밑으로 진입로가 있었다. 소피는 진입로를 막고 있는 문 앞에 택시를 세웠다. 머리 위에서는 비디오 카메라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랭던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감시 카메라와는 달리 저 카메라는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피는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운전자 쪽에 붙은 전자 계기판을 살폈다. 액정 자막 화면이 7개 국어로 안내사항을 보여주었다. 첫째 줄은 영어였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주머니에서 마마 자국이 있는 황금열쇠를 꺼낸 소피는 안내 계기판에 다시 주의를 돌렸다. 화면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열쇠와 저 구멍이 맞을 것 같소.”
랭던이 말했다.
소피는 열쇠의 다리를 구멍과 맞춘 후에 열쇠의 다리가 모두 들어갈 때까지 깊숙이 집어넣었다. 열쇠를 돌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즉시 문이 돌아가며 열렸다. 소피는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을 떼고, 두 번째 문의 계기판으로 차를 몰았다. 뒤에서 첫째 문이 닫히자, 그들은 수문 사이에 갇힌 배처럼 덫에 걸린 꼴이 되었다. 랭던은 갇힌 느낌이 정말 싫었다.
‘둘째 문에서도 작동해 주길 빌어야겠군.’
두 번째 안내 계기판도 익숙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소피가 열쇠를 꽂자, 두 번째 문도 즉시 열렸다. 잠시 후 그들은 진입로를 따라 건물의 중앙에 이르렀다. 고객용 주차장은 작고 어두웠다. 약 열두 대 정도의 차들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저쪽 끝에 건물의 입구가 있었다. 방문자들을 환영하는 붉은 카펫이 거대한 금속 문 앞까지 깔려 있었다.
‘혼합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군. 환영한다, 하지만 조심해라.’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는 출입구 근처에 택시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총은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좌석 밑에 총을 내려놓으며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와 랭던은 택시 밖으로 나와 강철 문으로 향하는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갔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문 옆의 벽에 삼각형의 열쇠 구멍이 나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배우는 게 더딘 사람은 들이지 않겠다는 얘기로군.”
랭던이 말했다. 소피가 불안한 얼굴로 웃었다.
“한번 가보죠.”
소피가 열쇠를 구멍에 꽂자, 문이 낮은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열렸다. 시선을 서로 주고 받으며 소피와 랭던은 안으로 들어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그들 뒤에서 닫혔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응접실은 랭던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실내 장식이었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윤기 흐르는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내부를 꾸미는데, 이 은행은 바닥에서부터 벽까지 금속과 대못만을 선택했다.
‘이 은행을 장식한 사람은 누구일까? 철강업계 협력 업체 사람인가?’
랭던은 의아했다. 로비를 살펴보는 소피도 겁먹은 표정이었다. 바닥, 벽 카운터, 문 심지어 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회색 금속 일색이었다. 틀에 부어 만든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인상적이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당신은 지하금고로 들어온 것 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뒤에서 몸집이 큰 남자가 보고 있던 작은 텔레비전을 끄고,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장대한 근육과 굵은 팔뚝에도 불구하고, 경비원의 목소리는 스위스 벨보이처럼 공손함을 갖추며 맑게 울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2개 국어로 인사하는 것은 유럽에서 공손함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손님에게 어느 쪽 언어가 더 편리한가를 알아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피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카운터 위에 황금열쇠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열쇠를 내려다보더니, 즉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물론입니다. 손님의 엘리베이터는 홀 끝에 있습니다.손님이 가고 있다고 제가 직원에게 알려 놓겠습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열쇠를 다시 집었다.
“몇 층이죠?”
남자는 소피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손님의 열쇠가 몇 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워야 하는지 알려줄 겁니다.”
소피는 미소로 답했다.
“아, 그렇군요.”
경비원은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다가가서 열쇠를 꽂고, 승강기에 올라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자, 경비원은 전화를 움켜쥐었다. 그들의 도착을 직원에게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객의 열쇠가 출입문 바깥에서 꽂혔을 때, 이미 금고 안내원은 자동적으로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비원은 대신 은행의 야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들으며, 경비원은 텔레비전을 다시 켜고 시청했다. 보고 있던 뉴스가 이제 막 끝나려던 참이었다. 경비원은 텔레비전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기 아래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오늘 밤 프랑스 경찰이 탈주자 두 사람을 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방금 우리 은행으로 들어왔습니다.”
매니저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좋아. 내가 즉시 베르네 씨에게 연락하지.”
경비원은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인터폴이었다.
승강기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랭던은 놀랐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건물에서, 지금 몇 층이나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층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랭던은 승강기 밖으로 나오게 되어 행복했다.
은행의 민첩함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안내 직원이 이미 그들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직원은 나이가 지긋하며 쾌활한 사람이었다. 깔끔한 플란넬 양복을 입은 모습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마치 하이테크 세계에 온 구시대의 은행가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원은 발을 돌려 좁은 복도를 경쾌하게 걸어 내려갔다. 랭던은 소피와 함께, 깜박이는 컴퓨터들이 들어찬 커다란 방 몇 개를 지나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자, 다 왔습니다.”
어떤 금속 문 앞에 이르러 문을 열어주면서 직원이 말했다. 랭던과 소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그들 앞에 있는 방은 작았지만, 고급 호텔의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금속과 대못은 사라지고, 참나무로 만든 가구와 동양산 카펫, 쿠션을 받친 의자들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넓은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뚜껑을 따놓은 페리에 병과 함께 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 페리에는 방금 딴 것인지 기포가 아직도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뜨거운 커피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시계처럼 정확하군. 이런 일은 스위스에 맡기라는 얘긴가.’
랭던은 생각했다. 직원은 랭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은행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시죠?”
소피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종종 열쇠들은 대를 이어 물려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은행에 처음 오신 고객들은 규정을 확실히 모르는 경우도 있답니다.”
직원은 몸짓으로 탁자 위의 음료수를 가리켰다.
“이 방은 손님이 계시고 싶을 때까지 손님의 방입니다.”
“열쇠가 가끔은 상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소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손님께서 가지고 계신 열쇠는 스위스 숫자로 된 계좌 같습니다. 그런 열쇠는 종종 대를 이어 물려받습니다. 우리 은행의 황금계좌의 경우, 안전금고 상자의 가장 짧은 임대 기간이 오십 년입니다. 미리 돈을 지불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가족들이 바뀌는 것을 흔하게 본답니다.”
랭던은 직원을 쳐다보았다.
“지금 오십 년이라고 그랬습니까?”
“최소한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보다 길게 임대 기간을 구입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계약 조건이 없다면, 오십 년 동안 계좌에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 경우에는 안전금고 안의 내용물은 폐기처분됩니다. 손님의 금고에 접속하는 과정을 설명해 드릴까요?”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주세요.”
안내원을 팔을 뻗어 호화로운 방 내부를 가리켰다.
“이 방은 손님의 개인 전용실입니다. 일단 제가 이 방을 나가면, 손님께선 여기에서 안전금고의 내용물을 살피고 정리하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안전금고는… 여기로 도착합니다.”
안내원은 랭던과 소피를 지나 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넓은 컨베이어 벨트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공항의 수화물 컨베이어와 흡사했다.
“손님의 열쇠를 저기에 꽂으면…”
안내원은 컨베이어 벨트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전자 계기판을 가리켰다. 계기판에 이제는 낯익은 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보였다.
“컴퓨터가 손님 열쇠를 확인하고 나면, 손님의 계좌번호를 누르십시오. 그러면 손님의 안전금고는 지하창고에서 자동으로 이 방으로 오게 됩니다. 손님이 볼일을 다 마치신 후에는, 안전금고를 다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열쇠를 꽂으면 이 과정이 거꾸로 진행됩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손님의 사적인 용무는 이곳 직원으로부터도 보호되는 것입니다. 뭔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방 가운데 있는 탁자 위의 버튼을 누르십시오.”
소피가 막 질문을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직원은 당황스럽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네?”
전화 통화를 하는 직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안내원은 불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나가 봐야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직원은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그때 소피가 직원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가기 전에 뭔가 확실히 좀 알려주시겠어요? 계좌번호를 눌러야 한다고 말했나요?”
직원은 창백한 얼굴로 문에서 멈춰 섰다.
“물론입니다. 대부분의 스위스 은행들처럼, 우리 은행의 안전금고도 이름이 아닌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열쇠와 오직 손님만이 알고 있는 개인 계좌번호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 열쇠는 손님이 금고의 주인임을 반밖에 증명해 주지 않거든요. 손님의 개인 계좌번호가 나머지 반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님이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누구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요.”
소피는 주저했다.
“그럼 만일 이 열쇠를 제게 물려준 사람이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면요?”
안내원의 가슴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분명히 이곳에서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얘기지!’
직원은 랭던과 소피에게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을 돕도록 누군가를 부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즉시 이 자리에 오도록 하지요.”
방을 나선 직원은 문을 닫고 방문을 잠갔다. 랭던과 소피를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시내 건너편에서는 콜레가 노르 기차 역에 서 있었다. 그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파슈였다.
“인터폴이 단서를 잡았네. 열차는 잊어버리게. 랭던과 느뵈가 방금 전 안전금고 은행의 파리 지점에 들어갔다는군. 즉시 그곳으로 사람들을 보내게.”
“소니에르 씨가 느뵈 요원과 로버트 랭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어떤 단서를 잡은 걸까요?”
파슈의 어조는 냉담했다.
“콜레 부관. 자네가 그들을 체포하면 그때 내가 직접 물어보겠네.”
콜레는 즉시 눈치챘다.
“악소 가 이십사 번지로 곧 출동하겠습니다. 반장님”
콜레는 전화를 끊고 요원들에게 무전을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