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던과 대화하기 위해 브쥐 파슈는 휴대 전화기를 꺼버렸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이 전화기는 파슈의 주문과 반대로 쌍방향 라디오 기능까지 갖춘 고급 모델이라서, 요원 한 명이 파슈를 호출했다.

 

“반장님?”

 

휴대 전화기가 무전기처럼 지직거렸다. 화가 난 파슈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비밀 감시작업을 방해받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도 없었다.

 

파슈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랭던을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허리띠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어 라디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왜?”

 

“반장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요원이 도착했습니다.”

 

파슈의 분노는 순간 가라앉았다.

 

‘암호 해독가?’

 

타이밍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룻바닥의 수수께끼 같은 소니에르의 글을 발견하고 나서, 파슈는 범죄 현장의 전체 사진을 암호 해독부의 컴퓨터에 올렸다. 빌어먹을, 소니에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누군가 얘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암호 해독가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은 누군가 소니에르의 메시지를 거의 풀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바쁘네. 그 암호 해독가에게 지휘 본부에서 기다리라고 하게.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그 남자를 만나볼 테니까.”

 

파슈는 반론의 여지가 없게 되받았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파슈의 말을 고쳤다.

 

“여자입니다. 느뵈 요원입니다.”

 

이 말에 파슈는 불쾌해졌다. 소피 느뵈는 DCPJ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이 젊은 파리지엥 해독가는 영국 로열 홀로웨이에서 암호 표기법을 공부했다. 2년 전 더 많은 여성을 경찰 인력에 포함시키려는 해당 부처의 의도에 따라, 느뵈는 파슈에게 은근슬쩍 떠넘겨진 것과 같은 존재였다. 경찰본부의 이런 계속적인 간섭은 부처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파슈는 주장해왔다. 여자는 경찰 업무에 필요한 체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현장에서 일하는 남자 요원들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파슈가 두려워하던 대로 느뵈는 그 누구보다 가장 심란한 존재였다.

 

서른두 살의 느뵈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끈기가 있었다. 영국의 새로운 해독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상관이자 베테랑인 프랑스 암호 해독가들을 끊임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파슈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진리다. 중년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사무실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은 남자들의 눈을 업무에서 떼놓게 만들기 일쑤였다.

 

전화기 속의 남자가 말했다.

 

“느뵈 요원이 당장 반장님과 이야기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막으려고 해봤지만 , 벌써 그쪽 화랑으로 갔습니다.”

 

파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움찔했다.

 

“말도 안 돼! 이건 분명히…”

 

순간, 로버트 랭던은 브쥐 파슈가 뇌출혈을 일으킨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말하는 도중에 턱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파슈의 불타는 눈동자는 랭던의 어깨 너머의 뭔가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랭던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랭던은 돌아서서 젊은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길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검은색 레깅스 위에 무릎까지 오는 크림색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매력적이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는 포도주 빛깔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버드 기숙사의 벽을 동경하는 히피풍의 골빈 금발 미인들과는 달리, 자신감을 온몸에서 풍기며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과 진실성을 갖춘 건강한 미인이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곧장 랭던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랭던 씨, 저는 DCPJ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느뵈 요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프랑스식 영어 억양으로 여자는 말을 부드럽게 굴렸다. 랭던은 여자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여자의 강한 시선이 자신에게 잠시 꽂히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눈동자는 날카롭고 깨끗한 올리브그린색 이었다.

 

파슈는 질책의 말을 날리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는 재빨리 돌아서서 파슈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반장님, 방해했다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파슈는 침까지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랭던에게 예의를 갖추려는 것처럼 소피는 계속 영어로 이야기했다.

 

“전화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반장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고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꺼놓았지. 랭던 씨와 얘기 중이었어.”

 

파슈가 핀잔을 주었다.

 

“그 숫자 코드를 해독했어요.”

 

소피는 단조롭게 말했다. 랭던은 한줄기 흥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기호를 풀었다고?’

 

파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 태도를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설명드리기 전에, 랭던 씨에게 전해 드릴 급한 메시지가 있어요.”

 

파슈의 표정이 짙은 우려를 드러냈다.

 

“랭던 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는 랭던에게로 돌아섰다.

 

“미국 대사관에 연락해 보세요. 랭던 씨, 미국에서 당신에게 보낸 메시지가 거기 있답니다.”

 

랭던은 코드에 대한 흥분보다 갑작스러운 걱정이 들어 놀랐다.

 

‘미국에서 보낸 메시지?’

 

누가 연락을 해왔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의 동료 중 단지 몇 명만이 랭던이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슈의 넓적한 턱이 뻣뻣하게 굳었다. 의심스럽다는 듯 파슈가 물었다.

 

“미국 대사관? 랭던 씨가 여기 있는 것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소피는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히 대사관에서 랭던 씨 호텔에 전화를 했을 테고, 호텔 안내인은 DCPJ요원이 랭던 씨를 데려갔다고 얘기했겠지요.”

 

파슈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사관에서 DCPJ 암호부서에 연락한 거야?”

 

“아닙니다. 반장님. 반장님에게 연락하려고 DCPJ의 교환국에 제가 전화 했을 때, 교환국에서 랭던 씨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반장님을 만나면 전해달라고 제게 부탁하던걸요.”

 

혼란스러워하는 파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파슈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피는 이미 랭던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소피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를 의도하는 시선으로 랭던에게 건넸다.

 

“랭던 씨, 이건 당신네 대사관의 메시지 서비스센터 전화번호예요. 가능하면 빨리 전화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반장님께 코드를 설명하는 동안 전화를 걸어 보시죠.”

 

랭던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파리를 나타내는 지역번호 뒤에 번호가 몇 개 더 적혀있었다. 랭던은 이제 걱정스러웠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전화기가 어디에 있죠?”

 

소피가 스웨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내자 파슈가 손을 저었다. 파슈는 막 폭발하려는 베수비오 화산처럼 보였다. 소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반장은 자기 휴대 전화기를 내밀었다.

 

“이 라인이 안전합니다. 랭던 씨, 이걸 사용하십시오.”

 

젊은 여자에 대한 파슈의 분노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랭던은 반장의 전화기를 받았다. 파슈는 즉시 소피를 대여섯 걸음 끌고 가서, 쉰 목소리로 힐문하기 시작했다. 랭던은 반장을 더욱더 혐오하면서 두 사람의 이상한 대결에서 시선을 거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소피가 건네준 종이를 확인하며 랭던은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랭던은 대사관 교환원의 목소리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어떤 전화기의 자동응답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바로 소피 느뵈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소피 느뵈입니다. 저는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만…”

 

당황해서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만, 느뵈 양? 당신이 제게 준 것은…”

 

랭던의 혼란을 예상이나 한 듯 소피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예요. 맞는 번호예요. 대사관은 자동 메시지 시스템이더군요. 당신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들으려면 접속 코드를 눌러야 할 거예요.”

 

랭던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드린 종이에 세 자리 숫자가 있죠? 바로 그거예요.”

 

이 이상한 실수를 설명하려고 랭던이 입을 여는 순간, 소피의 눈빛이 절박하게 빛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수정처럼 투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묻지 마세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랭던은 종이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454’

 

자동응답기에서 흘러나오던 소피의 인사말은 즉시 끊어졌다. 그리고 기계음으로 된 프랑스어 안내가 들렸다.

 

“새로운 메시지가 한 개 있습니다.”

 

분명이 이 454라는 번호는 소피가 집 밖에 있을 때, 집 전화기에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때 필요한 원거리 접속 코드였다.

 

‘내가 저 여자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듣게 되는 건가?’

 

테이프가 뒤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테이프가 멈추고,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랭던은 귀를 기울였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소피의 목소리였다. 메시지는 두려움에 찬 속삭임으로 시작했다.

 

“랭던 씨, 이 메시지에 반응하지 마세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지금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지시를 정확하게 따르세요.”

 

 

사일래스는 스승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 안에 앉아서, 위대한 생 쉴피스 교회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설치된 조명을 받고 있는 교회의 두 종탑이 기다란 건물 위로 충실한 보초처럼 솟아 있었다. 양쪽 측면에는 아름다운 야수의 갈비뼈처럼 매끄러운 버팀목들이 그림자 속에서 줄지어 있었다.

 

‘미개인들이 우리의 쐐기돌을 감추는 데 신의 집을 이용하다니.’

 

환각과 기만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조직의 명성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사일래스는 쐐기돌을 찾아서 스승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면 오래 전에 조직이 충실한 신자들에게서 빼앗긴 것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푸스 데이를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 것인가?’

 

생 쉴피스 교회 앞 공터에 아우디를 주차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사일래스는 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에 행한 육체 고행으로 등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푸스 데이가 자기를 구원하기 전에 겪던 삶의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들은 사일래스의 영혼을 찾아왔다. 사일래스는 자신에게 주문했다.

 

‘증오를 놓아라. 너를 짓밟고 간 자들을 용서해라.’

 

생 쉴피스 석탑을 올려다보면서 사일래스는 떠밀려 오는 익숙한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 기억들은 종종 시간을 거슬러서, 젊은 시절의 세계나 다름없던 감옥에 사일래스를 가둬 놓았다. 지옥과도 같던 그곳의 기억들은 바로 눈앞의 일처럼 되살아났다. 썩어빠진 양배추 냄새, 시체와 오줌똥에서 나는 악취, 피레네 산맥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 맞서 희망을 잃은 자들의 울음소리와 잊혀진 자들의 가냘픈 흐느낌.

 

‘안도라.’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황량하고 버려진 국가다. 돌로 만들어진 감방에서, 덜덜 떨며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일래스는 구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빛은 천둥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사일래스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사일래스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집을 떠났다. 덩치 큰 부두 노동자이던 사일래스의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아들이 알비노로 태어나자 아내를 패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내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아들이 엄마를 변호하고 나서면, 아들 역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어느 날 밤, 심하게 얻어맞은 엄마는 깨어나질 못했다. 엄마와 시신 위에 서서 소년은 이런 일의 근원이 된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어떤 악마가 소년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소년은 부엌으로 걸어가서 식칼을 집어들었다. 취해서 자고 있는 아버지의 방으로 최면에 걸린 듯 다가가, 한마디 말도 없이 소년은 뒤에서 아버지를 찔렀다. 아버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데굴데굴 굴렀지만, 아들은 방이 조용해 질 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다.

 

소년은 집을 떠났다. 그러나 마르세유의 길거리도 편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기이한 외모는 떠도는 젊은 부랑자들 틈에서도 소년을 외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버려진 공장 지하에서 혼자 지내며 부두에서 훔친 과일이나 날생선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너덜너덜한 잡지들이었고, 그런 잡지들을 통해 스스로 읽는 법을 배웠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였다. 소년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다른 부랑자가 소년을 조롱하면서 소년의 음식을 훔치려고 했다. 소년은 그 부랑자를 죽을 만큼 구타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소년의 몸을 떼어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당국은 소년에게 최후 통첩을 내렸다. 청소년 감옥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해안을 따라 툴롱까지 내려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두려워하는 시선으로 변했다. 소년은 힘센 젊은이로 자랐다. 사람들은 몹시 놀란 눈으로 젊은이의 허연 피부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유령 같아.”

 

“악마의 눈을 가진 유령이야.”

 

청년도 자신이 유령처럼 여겨졌다. 투명하고…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떠도는…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여덟 살 때, 어느 항구 마을에서였다. 화물선에서 햄 통조림 한개를 훔치려다가 선원 두 명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년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두 선원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청년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공포와 증오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곳에서 괴물처럼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맨손으로 선원 한 명의 목을 부러뜨렸고, 다른 선원은 때마침 도착한 경찰 덕분에 비슷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두 달 후, 청년은 쇠고랑을 차고 안도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알몸으로 추위에 떠는 청년을 간수들이 데리고 들어서자 감방의 다른 죄수들이 조롱했다.

 

“네 놈은 유령처럼 허옇구나.”

 

“저 유령을 좀 봐! 저놈의 유령은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2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청년의 영혼과 육체는 스스로 투명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유령이다.’

 

‘나는 무게가 전혀 없다.’

 

‘나는 유령이다… 유령처럼 창백하고… 홀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

 

어느 날 밤, 유령은 다른 감방 죄수들의 비명에 잠을 깼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자고 있는 방바닥을 흔드는 건지, 어떤 거대한 손이 돌로 만들어진 감방의 회벽을 흔드는 건지 유령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어섰을 때, 커다란 둥근 돌이 유령이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떨어졌다.돌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벽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 지난 10년 동안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달이었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좁은 갱도를 기어서 바깥세상으로 비틀비틀 나아갔다. 황량한 산 옆자락을 구르고 굴러서 숲으로 달아났다. 유령은 굶주림과 피로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밤새도록 달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은 숲 개간지에서 기차가 풀을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 바퀴자국을 따라갔다. 빈 화물 운송칸을 발견하고 은신처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 기어들었다. 잠이 깼을 때 기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잤지? 얼마나 멀리 온 거지?’

 

뱃속의 고통이 커져갔다.

 

‘난 죽는 걸까?’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깼을 때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때리며, 화물칸에서 그를 끌어내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 유령은 음식을 찾아 작은 시골마을의 변두리를 어슬렁거렸다. 마침내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의식을 잃고 길가에 쓰러졌다.

 

서서히 빛이 다가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죽어 지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사흘? 상관없었다. 침대는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주위의 공기는 양초들 때문에 밝고 달콤했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있다. 돌은 옆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너는 다시 태어났다.”

 

유령은 자다가 깨어났다. 안개가 의식을 감싸고 있었다. 유령은 결코 천국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셨다. 침대 옆에는 음식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먹었다. 뼈에 살이 다시 붙는 것 같았다. 또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웃으며 내려다보다가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너는 구원되었다. 내 길을 따른 이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를 선잠에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유령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소리 나는 곳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부엌으로 들어섰을 때, 덩치 큰 남자가 작은 남자를 때리는 것이 보였다.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유령은 큰 남자를 붙잡아 벽에다 내팽개쳤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와 버티고 서 있는 유령을 남겨두고 덩치 큰 남자는 도망쳐 버렸다. 사제의 코뼈는 심하게 주저앉았다. 유령은 피투성이가 된 사제를 안고서 소파로 옮겼다. 사제는 서툰 프랑스어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의 친구여, 교회 헌금은 도둑들을 유혹하는 법입니다. 자면서 프랑스어를 하던데, 스페인어도 할 줄 압니까?”

 

유령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제는 계속해서 서툰 프랑스어로 물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들은 것이라곤 간수들의 조롱이 전부였다.

사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내 이름은 마누엘 아링가로사 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온 선교사지요. 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지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유령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오비에도라고, 스페인 북부 지역입니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어떤 사람이 문간에 당신을 두고 갔습니다. 당신은 아팠어요 제가 당신을 보살폈습니다. 여기에 꽤 오랫동안 있었지요.”

 

그는 자기를 돌봐준 젊은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친절을 받는다는 게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사제는 맞아서 터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친구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를 둘러싼 세계가 좀더 분명해진 것 같았다. 유령은 침대 위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십자가는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 존재에 마음이 놓였다. 일어나 앉아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오려진 신문을 보고 유령은 깜짝 놀랐다. 기사는 1주일 전 것으로 프랑스어로 씌어 있었다. 기사를 읽고 난 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문은 피레네 산맥에서 발생한 지진이 감옥 시설을 파괴했고, 그 결과 위험한 많은 죄수들이 달아났다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저 사제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유령이 느낀 감정은 한동안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부끄러움, 죄의식, 이런 감정들이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밀려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행동 지침서입니다.”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본 유령은 깜짝 놀랐다. 젊은 사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웃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코에 붕대를 싸매고 들어온 사제는 낡은 성경책을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서 프랑스어로 된 성경책을 찾았습니다. 읽을 부분은 표시해 두었어요.”

 

16장.


성서 구절은 사일래스라는 죄수에 관한 얘기였다.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진 채 감방에 누운 사일래스는 신에게 찬송가를 불렀다. 26절에 이르렀을 때, 유령은 충격을 받았다.

 

‘… 그리고 엄청난 지진이 있었다. 감옥의 기반이 흔들리고 모든 문이 열렸다.’

 

유령은 사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제는 따뜻하게 웃었다.

 

“친구여, 이름이 없다면 지금부터 당신을 사일래스라고 부르겠습니다.”

 

유령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래스. 살을 부여받은 것이다.

 

‘내 이름은 사일래스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지중해 상공 6킬로미터 위에서는 승객들이 불안을 느낄 정도로, 알이탈리아 항공 1618편이 난기류에 들썩이며 날고 있었다. 하지만 아링가로사 주교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주교는 오푸스 데이의 앞날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파리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사일래스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했다.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스승은 설명했다.

 

“이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요. 요즘 전자통신은 우리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소. 그 결과는 당신에게 재앙이 될 것이오.”

 

스승이 옳다는 것을 아링가로사는 알고 있었다. 스승은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아링가로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복종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스승은 매우 비밀스러운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조직의 고위직 인사 네 사람의 이름을!’

 

이 사건은 스승이 놀라운 영광을 가져다 줄 진정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교에게 확신시켜 준 일 중 하나다. 스승은 아링가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교, 모든 준비는 다 마쳤소. 내 계획이 성공하려면, 요 며칠 간 사일래스가 오직 나에게만 대답하게 해야 하오. 그리고 사일래스와 주교,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마시오. 나는 다른 안전한 채널을 통해서 사일래스와 연락할 것이오.”

 

“사일래스를 존중해 주실 겁니까?”

 

“신념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최고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소.”

 

“훌륭하십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사일래스와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분과 사일래스의 신분, 그리고 내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투자?”

 

“주교, 만일 일의 진전을 세세하게 알고 싶은 당신의 열망 때문에 자칫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주교는 내게 돈을 지불하지 못할 것이오.”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우리의 열망은 한 가지니까요. 성공을 기원합니다.”

 

‘이천만 유로.’

 

이제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주교는 생각했다. 이 액수는 미국 달러 가치와 거의 비슷한 금액이다.

 

‘아주 엄청난 것의 대가치곤 푼돈이지.’

 

스승과 사일래스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력하게 들었다. 돈과 신념은 강력한 동기유발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