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로마 교황의 궁은 바티칸 시국 북동쪽, 시스티나 소성당 근처에 있는 여러 건물들의 집합체이다. 산 피에트로 광장이 내다보이는 궁에는 교황의 아파트와 집무실이 있다.
비토리아와 랭던은 올리베티 사령관이 안내하는 대로 침묵 속에 로코코 양식의 긴 회랑을 따라갔다. 사령관의 목 근육은 분노로 펄떡거렸다. 그들은 세 채의 계단을 오른 후 희미하게 불을 밝힌 넓은 복도로 들어섰다.
랭던은 벽에 걸린 예술작품들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갓 만든 것처럼 보존상태가 뛰어나 흉상, 태피스트리, 벽의 조각장식들. 모두 수십만 달러는 나갈 것 같았다. 복도를 3분의 2쯤 지나갔을 때, 일행은 설화 석고로 만든 분수를 지나쳤다. 올리베티는 왼쪽으로 꺾어, 우묵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랭던이 이제까지 본 문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문이 버티고 있었다.
“교황님의 집무실이오.”
비토리아에게 신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령관이 말했다. 비토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올리베티를 지나 시끄럽게 문을 노크했다.
‘교황의 집무실’
랭던은 지금 자신이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한 방 가운데 하나인 교황의 집무실 앞에 서 있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들어오십시오!”
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문이 열리자 랭던은 눈을 감아야만 했다. 햇빛이 그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초점이 맞춰지면서 모습이 들어왔다.
교황의 집무실은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무도회장 같았다. 붉은 대리석 바닥이 벽까지 사방으로 뻗어있고, 선명한 프레스코화가 벽을 치장하였다. 머리 위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있고, 아치 모양의 창문은 햇살을 듬뿍 머금은 광장의 멋진 풍경을 선사하였다.
랭던은 생각했다.
‘세상에, 정말 기막히게 전망 좋은 방이로군.’
방의 맨 끝에 조각한 책상이 있고, 그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서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남자가 펜을 놓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시 외쳤다. 올리베티가 군인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리고 사죄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궁무처장님. 이들을 막을 수가…”
남자는 사령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방문객들을 살폈다.
궁무처장의 모습은 바티칸을 돌아다니면 보통 볼 수 있는 유순하고 행복에 겨운 노인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남자는 로사리오 목걸이나 펜던트도 걸치지 않았다. 무거운 의복도 입지 않았다. 대신에 실질적인 견실함을 강조하려는 듯, 단순한 검은색 일상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3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바티칸의 평균 연령으로 보면 정말 어린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궁무처장은 놀랍도록 잘생겼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과 형형한 녹색 눈동자, 우주의 신비에 자극받은 듯 그의 눈동자는 빛났다. 하지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랭던은 그의 눈에 담긴 극도의 피로를 읽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보름 기간을 지나온 영혼 같았다.
“저는 카를로 벤트레스카입니다.”
남자의 영어 발음은 완벽했다.
“서거하신 교황님의 궁무처장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식이 없고 친절했다. 이탈리아 억양이 아주 약간 베어있었다. 앞으로 나서서 손을 내밀며 비토리아가 말했다.
“비토리아 베트라입니다. 저희를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궁무처장이 비토리아와 악수하자 올리베티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비토리아가 소개했다.
“이쪽은 로버트 랭던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종교학자이죠.”
“궁무처장님.”
최고의 이탈리아 억양을 구사하며 랭던이 인사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머리를 숙였다. 남자는 랭던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교황의 신성한 집무실이 저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낱 사제에 불과합니다. 필요한 시간만큼 여기에서 봉사하는 시종일 뿐이죠.”
랭던은 똑바로 일어섰다. 남자가 말했다.
“자, 모두 앉읍시다.”
그리고 책상 주변의 의자들을 모아서 자리를 만들었다. 랭던과 비토리아는 앉고, 올리베티는 서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남자는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면서 방문객들을 바라보았다.
올리베티가 말했다.
“궁무처장님. 여자의 복장은 제 실수입니다. 제가…”
“여자 분의 복장은 제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성가시게 하는 데 많이 지쳤다는 투로 남자는 응답했다.
“선거회의를 시작하기 전 삼십 분을 두고, 바티칸의 전화교환원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사령관의 개인 사무실에서 전화를 했는데, 제가 보고받지 못한 중대한 보안상의 위협에 관해 경고하기 위해서라더군요. 그게 걱정입니다.”
올리베티는 굳은 채 서 있었다. 가혹한 취조를 받는 군인처럼 그의 등은 활처럼 휘어 있었다.
랭던은 궁무처장의 존재에 최면이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젊고 지쳐 보였지만, 어딘가 신비한 영웅적인 분위기를 간직했다. 카리스마와 권위를 발산하는 젊은 사제였다.
올리베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사과조를 띠긴 했지만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궁무처장님. 보안문제로 몸소 걱정하셔서는 안 됩니다. 다른 책임들이 많으시니까요.”
“물론 제가 해야 할 다른 책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책임자로서 선거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책임이 제게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저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랭던이 구겨진 종이를 꺼내 궁무처장에게 건네며 불쑥 입을 열었다.
“궁무처장님 보시죠.”
올리베티 사령관이 끼어들려고 앞으로 나섰다.
“궁무처장님 이런 걸로 정신을 어지럽히시지 않는 것이…”
궁무처장은 꽤 오랫동안 올리베티를 무시하면서 종이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살해당한 레오나르도 베트라의 모습을 보고 놀란 숨을 내쉬었다.
“이게 뭡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비토리아가 대답했다.
“그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사제이자 과학자이셨어요. 어젯밤에 살해되셨습니다.”
궁무처장의 얼굴이 즉시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비토리아를 쳐다보았다.
“내 어린양 유감입니다.”
남자는 성호를 긋고,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혐오의 빛이 가득했다.
“누가 이런… 가슴의 이 낙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궁무처장은 말을 멈췄다. 랭던이 끼어들었다.
“일루미나티라고 적힌 겁니다. 궁무처장님도 물론 그 이름을 알고 계시겠죠.”
궁무처장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지나갔다.
“네, 이름은 들어봤습니다만, 하지만…”
“일루미나티가 레오나르도 베트라 박사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기술을 훔쳐서…”
올리베티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궁무처장님,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일루미나티? 이건 분명 잘 꾸며낸 속임수입니다.”
궁무처장은 올리베티의 말을 고려해보는 것 같았다. 그런 뒤에 돌아서서 랭던의 말을 심사숙고했다. 랭던은 자신의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랭던씨, 저는 제 인생을 가톨릭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일루미나티에 관한 얘기는 잘 압니다. 그리고 낙인의 전설도 잘 알지요. 하지만 당신께 경고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현재 시제의 인간입니다. 과거의 유령을 부활시키지 않더라도, 기독교의 진짜 적들은 충분합니다.”
“거기에 나온 상징은 진짜입니다.”
너무 방어적이라 생각하면서 랭던은 주장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궁무처장을 위해 종이를 돌려보였다. 낙인의 대칭성을 보자 궁무처장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랭던이 말을 덧붙였다.
“현대의 컴퓨터들조차 이 단어의 대칭적인 앰비그램을 위조하지 못했습니다.”
궁무처장은 팔장을 끼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루미나티는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오래 전에. 이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역시 궁무처장님의 의견에 동의했을 겁니다.”
“어제?”
“오늘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전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일루미나티가 고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표면에 떠올랐다고 믿고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저의 역사 지식은 녹이 슬었습니다. 고대의 무슨 약속을 말하는 겁니까?”
랭던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바티칸 시국의 파괴입니다.”
“바티칸 시국을 파괴한다고요?”
궁무처장은 놀랐다기보다는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비토리아가 머리를 저었다.
“저희는 더 나쁜 소식을 몇 가지 가지고 있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비토리아에게서 올리베티에게로 돌아서며 궁무처장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올리베티가 안심시켰다.
“궁무처장님. 여기에 어떤 장치 같은 게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저희 보안 모니터에 분명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물질의 파괴력에 관한 베트라양의 주장을 인정할 수가 없…”
궁무처장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걸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선 카메라 팔십육 번입니다.”
“그럼 왜 수거하지 않습니까?”
궁무처장의 목소리는 이제 노여움을 담고 울려 퍼졌다.
“그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올리베티는 꼿꼿이 몸을 세웠다. 궁무처장은 귀를 기울였다. 비토리아는 궁무처장의 근심이 커지는 것을 감지하였다. 궁무처장이 물었다.
“그 물건이 바티칸 시국 내부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까? 어쩌면 누군가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서, 바깥 어딘가에서 화면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올리베티가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외벽은 내부 통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자 보호막이 가동되는 상태입니다. 오직 바티칸 내부에서 나오는 신호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밖에 있다면 우리는 화면을 전송받을 수 없습니다.”
궁무처장이 말했다.
“그럼 사령관은 지금 모든 노력을 총동원해 사라진 카메라를 찾고 계시겠군요?”
올리베티는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라진 카메라를 찾는 일은 수백 명의 인력과 긴 시간을 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다른 보안 문제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베트라 양이 말하는 물건은 아주 작은 물방울 같은 것입니다. 베트라 양의 주장대로. 그 작은 한 방울이 그런 폭발력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토리아의 인내심이 사라졌다.
“그 작은 한 방울이 바티칸 시국을 충분히 초토화시킬 수 있어요! 제가 사령관님께 드린 얘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시지 않았나요?”
강철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올리베티가 말했다.
“베트라 양, 폭발물에 관한 내 경험은 아주 광범위하오.”
비토리아는 똑같이 거친 목소리로 되쏘았다.
“사령관님의 경험은 구식이에요. 지금 제 옷차림이 비록 이런 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입자연구소의 선임연구원입니다. 제가 디자인한 반물질 트랩 장치는 그 작은 한 방울이 지금 당장 폭발하는 것만을 막고 있어요. 사령관님께 경고하는데, 만일 앞으로 여섯 시간 안에 그 트랩을 찾아내지 못하면, 사령관님의 근위대는 다음 세기에 보호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지상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올리베티는 궁무처장에게 돌아섰다. 곤충 같은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쩍였다.
“제 양심을 걸고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궁무처장님의 시간을 이 장난꾸러기들이 낭비하고 있습니다. 일루미나티? 작은 방울 하나가 우리 모두를 파괴할 거라고?”
“두 사람 모두 됐습니다.”
궁무처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조용히 자제시켰지만, 그 말을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궁무처장은 계속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일루미나티든 일루미나티가 아니든, 그 물질이 무엇이든간에 바티칸 시국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임이 확실합니다. 적어도 선거회의 전야에는 안 됩니다. 저 물건을 찾아서 제거하기 바랍니다. 즉시 수색 팀을 조직하세요.”
올리베티가 고집을 피웠다.
“궁무처장님, 바티칸 시국의 건물을 수색하기 위해 모든 인력을 동원한다 해도, 카메라를 찾는 일은 수일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라 양과 얘기를 나눈 후, 저는 반물질의 성분을 알아보기 위해 부하에게 최신 탄도학 안내서를 찾아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반물질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혀요.”
비토리아는 생각했다.
‘거드름을 피우는 머저리. 탄도학 안내서? 백과사전은 왜 안 보셨지? A 아래를 말이야!’
올리베티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고집했다.
“궁무처장님. 만일 궁무처장님이 바티칸 시국 전체를 맨 눈으로 수색하자고 하시는 거라면, 저는 반대입니다.”
궁무처장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 집무실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음을 상기시켜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령관님은 제 위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따라 이곳의 책임자는 저입니다. 제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추기경님들은 안전하게 시스티나 소성당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선거회의가 해산될 때까지, 사령관님의 보안 걱정도 줄어들 겁니다. 제가 사정을 잘 몰랐다면, 사령관님이 이번 선거회의를 고의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려는 것처럼 보았을 겁니다.”
올리베티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나는 당신의 교황님을 12년 동안이나 모셨소! 그리고 그 전 교황님을 14년동안 섬겼고! 1438년 이래 우리 스위스 근위대는…”
그때 올리베티의 허리띠에 달린 무전기가 시끄럽게 삑삑거리며 말을 잘랐다.
“사령관님?”
올리베티는 무전기를 낚아채 전송 버튼을 눌렀다.
“사령관이다! 무슨 일인가!”
무전기에서 스위스 근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화가 왔는데 우리가 받고 있는 폭탄의 위협의 정보를 알려드려야겠기에 연락드렸습니다.”
올리베티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처리해! 평소 추적 방식대로 실행하고. 결과를 보고하게.”
“그렇게 했습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근위병은 망설였다.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전화를 건 사람은 사령관님께서 제게 조사시킨 물질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반물질 말입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자가 뭘 언급했다고?”
올리베티는 비틀거렸다.
“반물질입니다. 사령관님. 우리가 추적 과정에서 그 자의 주장을 추가 조사했습니다. 반물질에 관한 정보는… 글쎄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반물질은 꽤 골칫거리 같습니다.”
“탄도학 안내서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인터넷에서 알아낸 것입니다.”
‘할렐루야.’
비토리아는 생각했다. 근위병의 말이 이어졌다.
“반물질은 굉장히 폭발성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보가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반물질은 같은 비율의 핵탄두보다 백 배 이상의 위력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올리베티의 몸이 구부정해졌다. 산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비토리아의 승리감은 궁무처장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의 표정과 함께 싹 달아나고 말았다.
“그 전화를 추적했나?”
올리베티는 여전히 비틀거렸다.
“운이 안 좋았습니다. 사용자의 휴대전화기는 여러 암호로 덮어씌워져 있습니다. SAT라인들이 서로 합선되어, 삼각측량이 불가능합니다. 중파 신호는 그 자가 로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남자를 추적할 방법은 없습니다. (SAT:음성채널의 통화로 구성 상태를 감지하기 위한 가청 주파수 supervisory audio tone)
“그 자가 무슨 요구를 하던가?”
올리베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없습니다. 그저 바티칸 내부에 반물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싶었답니다. 제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놀란 눈치였습니다. 제게 반물질을 아직 못 보았느냐고 묻더군요. 사령관님도 제게 반물질에 관한 것을 물으셨기에, 알려드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올리베티가 말했다.
“잘했네. 곧 그리로 가겠네. 그 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즉시 알려주게.”
무전기에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자와 아직 통화중입니다. 사령관님.”
올리베티의 표정은 전기에 감전된 사람 같았다.
“전화를 아직 끊지 않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십 분 동안 그 자의 위치를 추적하려고 애썼지만, 추적 범위를 넓히는 것 외에 아직 얻은 게 없습니다. 그 자는 우리가 자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궁무처장님과 대화하기 전에는 전화를 끊지 않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궁무처장이 명령했다.
“그 자를 연결하세요. 지금 당장!”
올리베티가 돌아섰다.
“궁무처장님. 안 됩니다. 이 일은 훈련된 스위스 근위대 협상가가 다루는 게 낫습니다.”
“당장!”
올리베티가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벤트레스카 궁무처장 책상의 전화기가 울려댔다. 궁무처장은 전화기의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신의 이름으로.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궁무처장의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오만함이 밴 차갑고 금속적인 목소리였다. 방 안의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랭던은 남자의 억양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혹시 중동 지방인가?’
낯선 억양을 구사하며 남자는 말을 시작했다.
“나는 고대 조직의 심부름꾼이오. 바티칸이 수백 년 동안 중상모략해 온 조직이지. 나는 일루미나티의 사자(使者)요.”
랭던은 근육이 팽팽히 당기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남은 의심의 조각들이 사그라들었다. 순간 랭던은 오늘 아침 앰비그램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스릴과 특권, 그리고 무서운 공포가 서로 뒤범벅이 된 익숙한 느낌을 맛보았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궁무처장이 물었다.
“나는 과학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소. 당신처럼 해답을 찾는 사람들이지. 인간의 운명, 인간의 목적, 인간의 창조자에 대한 답들.”
궁무처장이 말했다.
“당신이 누구이든간에 나는…”
“쉿! 그냥 듣는 게 더 좋을 거요. 이천 년 동안 당신네 교회는 진실을 위한 탐구를 독점해왔소. 교회에 반대하는 자는 거짓말과 파멸의 예언 따위로 뭉개버렸지. 바티칸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진실을 조작했고, 사람들의 발견이 바티칸의 정치에 부합되지 않으면 살해해버렸지. 바티칸이 지구상에서 계몽된 모든 이들의 목표가 된 것에 놀랐소?”
“계몽된 자들은 자신의 논리를 펴기 위해 협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전화를 건 남자가 웃었다.
“협박? 이건 협박이 아니오. 우리는 어떤 요구도 없거든. 바티칸의 멸망은 협상 가능한 내용이 아니야. 우리는 이 날을 위해 사백 년을 기다렸지. 자정이 되면 당신들의 도시는 무너질 것이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어.”
올리베티는 폭풍이 몰아치듯 스피커폰으로 다가갔다.
“바티칸 시국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놈이 여기에 폭발물을 심어놓았을 리가 없다!”
“지금 말한 사람은 바티칸에 대한 스위스 근위대의 무식한 헌신을 담고 있군. 스위스 근위병이신가? 물론 당신은 수백 년 동안 일루미나티가 지구상의 일류 조직들에 침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바티칸은 면역이 되어. 정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느님 맙소사. 이 안에 저들의 내통자가 있다.’
랭던은 생각했다. 일루미나티의 힘의 상징이 침투라는 건 비밀도 아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과 유력 은행의 네트워크. 정부단체 등에 침투했다. 사실 처칠은 한때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루미나티가 영국 의회에 침투한 정도로 영국 스파이가 나치에 침투했다면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났을 것’이라고.
올리베티가 냉큼 말을 잘랐다.
“명백한 허풍이다. 네놈 조직의 영향력이 이렇게 멀리까지 미쳤을 리가 없어.”
“왜지? 당신네 스위스 근위병이 불침번을 서며 지키기 때문에? 바티칸 구석구석을 지켜보기 때문에? 스위스 근위병. 그 자체는 어떤가?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당신은 그들이 물 위를 걷는 남자에 관한 우화에 자신들의 목숨을 진심으로 걸고 있다고 믿는 건가? 그 반물질 보관용기가 어떻게 당신네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아니면 당신네 가장 값진 자산인 친구 네 명이 오늘 오후에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물어보든지.”
올리베티는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의 자산? 무슨 소리냐?”
“하나, 둘, 셋, 넷, 지금쯤 자네는 그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올리베티는 곧 말을 멈췄다. 배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쑥 커졌다. 전화를 건 남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제야 서서히 깨달은 모양이군.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황한 궁무처장이 물었다. 전화를 건 남자가 웃었다.
“당신네 근위병 나리가 아직 당신에게 보고를 안 한 모양이지? 이 얼마나 큰 죄인가. 놀랄 것도 없지. 그건 자존심일 테니까. 당신에게 진실을 밝혀야 하는 불명예를 상상해보라고. 근위대가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네 명의 추기경이 사라진 사실을 말이야…”
올리베티가 발끈했다.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느냐?”
전화를 건 남자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무처장. 당신네 사령관에게 물어보시오. 당신네 추기경 모두가 시스티나 소성당에 무사히 있는지를.”
궁무처장의 눈길이 올리베티를 향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설명을 요구했다. 올리베티는 궁무처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궁무처장님. 추기경 네 분이 아직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가시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경보를 울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모든 추기경님들이 숙소에 계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그 분들은 바티칸 시국 안에 안전하게 계실 겁니다. 궁무처장님도 불과 한 시간 전에 그분들과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까. 단순히 선거회의 전에 갖는 우정의 모임 자리에 늦으시는 것뿐입니다. 저희가 찾고 있긴 합니다만 분명 그분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책을 즐기고 계실 겁니다.”
궁무처장의 목소리에서 평정이 사라졌다.
“산책을 즐기신다고요? 그분들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성당에 계셔야 할 분들입니다!”
랭던은 비토리아에게 경악에 찬 시선을 던졌다.
‘사라진 추기경들? 그럼 아래층에서 근위병들이 찾던 게 추기경이었다는 말인가?’
전화 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내 재고품 목록이 꽤나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파리에서 온 라마세 추기경, 바르셀로나에서 온 가이드라 추기경,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에브너 추기경…”
이름을 한 명씩 부를 때마다 올리베티의 몸은 점점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이름을 부를 때 특히 즐거운 듯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바치아 추기경.”
궁무처장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에 돛을 올린 범선처럼 힘이 풀어졌다. 사제복이 펄럭거리며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궁무처장이 속삭였다.
“발탁한 후보자들, 바치아 추기경을 포함한… 네 명의 후보들… 가장 유망한 교황의 계승자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랭던은 현대의 교황 선출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궁무처장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적인 표정을 이해하였다. 법적으로 여든 살 이상의 추기경은 누구나 교황이 될 수 있지만, 치열한 투표과정에서 출석자 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표와 존경을 얻는 사람은 불과 소수 몇 명 뿐이었다. 그들이 바로 발탁된 후보자들이고, 지금 그들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궁무처장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분들을 데리고 어쩔 작정이오?”
“내가 어쩔 작정이라고 생각하지? 나는 하사신의 후손이오.”
랭던은 전율했다. 그 이름을 잘 알고 있다.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몇몇 치명적인 적을 만들었다. 하사신, 성당기사단, 바티칸에 사냥당하거나 배신당한 군대들.
궁무처장이 말했다.
“추기경들을 풀어주시오. 신의 도시를 파괴하는 것으로 위협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네 추기경 네 명은 잊어버리시지. 그들은 당신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기억되리라는 것은 내가 보장하지.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억할거야. 모든 순교자들의 꿈이지. 내가 그들을 언론에서 떠드는 유명인사로 만들어주지. 한 사람 한 사람씩. 오늘 밤 자정에는 모든 사람이 일루미나티에 주목하겠지. 세계가 지켜보지 않는다면 왜 세계를 바꾸겠는가? 공개 처형은 사람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공포를 안겨주지. 안 그런가? 당신네 교회는 오래 전에 이를 증명했어. 종교재판, 성당기사단에 가한 고문, 십자군.”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물론 정죄(淨罪)도 있지.”
궁무처장은 말이 없었다. 남자가 물었다.
“당신은 정죄를 기억하지 못하나? 물론 기억 못하겠지. 당신은 아이였을 테니까. 어쨌든 사제들이란 가련한 역사가이지. 어쩌면 바티칸의 역사가 사제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정죄라. 1668년 교회는 네 명의 과학자들에게 십자가 상징을 낙인 찍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서.”
랭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가 말하는 거지? 거기에 다른 누가 또 있나?”
당황하기보다는 더욱 즐기는 분위기를 풍기며 전화 속의 목소리가 물었다. 랭던은 현기증을 느꼈다.
“내 이름은 중요하지 않소.”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쓰며 랭던은 대답했다. 살아 있는 일루미나티 단원과 말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런 경험이다. 마치 조지 워싱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당신 조직을 연구하는 학자요.”
전화 속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훌륭해. 우리에게 저지른 죄악을 기억하는 자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어서 기쁘군.”
“대부분은 당신네 조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소.”
“조직이 열심히 퍼뜨려온 거짓 정보지. 정죄에 대해서 그 외에 무엇을 알고 있나?”
랭던은 망설였다.
‘내가 무엇을 더 알고 있느냐고? 이 모든 상황이 미쳤다는 것, 그게 내가 아는 것이다!’
“낙인이 찍힌 후에 과학자들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로마 주변의 공개 장소에 버려졌지. 다른 과학자들에게 일루미나티에 합류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서.”
“그래. 그래서 우리도 같은 일을 할 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Quid pro quo). 살해된 우리 형제들을 위한 상징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당신네 추기경 네 사람은 죽을 거요. 여덟 시부터 시작해서, 매 시간에 한 사람씩, 자정이 되면, 이 일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릴 거이오.”
랭던은 전화기로 다가갔다.
“정말 그 네 사람에게 낙인 찍어서 죽일 작정이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교회가 한 것보다 우아하고 대담하게 해낼 것이오. 교회는 우리를 은밀하게 죽이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시신을 버렸지. 너무 겁쟁이 같은 짓이었어.”
랭던이 물었다.
“무슨 소리요? 그럼 당신들은 그들에게 낙인을 찍어 공개석상에서 죽이겠단 거요?”
“잘 아는군. 하지만 당신들이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을 알 테니까.”
랭던은 깜짝 놀라 재차 확인했다.
“추기경들을 교회에서 죽일 작정이오?”
“우리의 친절함을 보여주는 행동이지. 신이 그들의 영혼을 더 신속하게 불러들일 수 있게 말이야. 참으로 올바르지 않나? 물론 언론도 이를 즐길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네놈은 허풍을 떨고 있곤. 교회에서 사람을 죽이고, 거기에서 도망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올리베티가 경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시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허풍? 우리는 당신네 스위스 근위병들 사이를 유령처럼 지나다녔어. 당신네 담장 안에서 네 명의 추기경들을 빼내왔지. 그리고 당신들에게 가장 신성한 성소의 심장에 치명적인 폭발물을 심어놓았어. 이게 다 허풍같나? 살인이 시작되고 희생자가 발견되면, 언론은 벌떼처럼 몰려들거야. 자정에는 일루미나티가 해낸 일을 전 세계가 알게 되겠지.”
“만일 우리가 모든 교회에 근위병을 배치한다면?”
올리베티가 말했다. 남자는 웃었다.
“당신네 종교의 다산성이 당신의 일을 어렵게 만들 것 같아 걱정이군. 최근에 세어보지 않았을 테지? 로마에는 사백 개 이상의 가톨릭 교회가 있지. 대성당, 교회, 소성당, 사원, 수도원, 수녀원, 가톨릭교구 부속학교들…”
올리베티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졌다. 남자는 최후 통첩을 담은 짤막한 말을 던졌다.
“90분 후에 시작한다. 한 시간에 한 사람씩, 죽음의 수학적 진행이지. 이제 가야겠군.”
“기다려! 추기경들에게 사용할 낙인에 관해 말해주시오.”
랭던이 소리쳤다. 남자의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어떤 낙인이 사용될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당신은 무신론자인가? 곧 낙인들을 충분히 보게 될 거야. 고대의 전설이 진실이라는 증거를.”
랭던은 현기증이 났다. 그는 남자가 주장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랭던은 레오나르도 베트라의 가슴에 찍힌 낙인을 떠올렸다. 일루미나티에 관해 떠도는 전설에는 모두 다섯 가지 낙인 이야기가 있다. 랭던은 생각했다.
‘네 개의 낙인이 남았다. 그리고 사라진 추기경이 네 명.’
궁무처장이 말했다.
“나는 오늘 밤 새로운 교황을 모셔오기로 맹세했소. 신이 내게 시킨 것이오.”
남자가 말했다.
“궁무처장. 세상에는 더 이상 새 교황이 필요 없소. 자정이 지나면 새 교황은 파편 부스러기 외에는 지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가톨릭교회는 끝장난 거지. 이 세상을 당신네가 다스리던 시대는 끝났어.”
침묵이 흘렀다. 궁무처장의 얼굴은 진실로 슬퍼 보였다.
“당신은 잘못 인도되었소. 교회는 회반죽이나 돌멩이 이상의 것이오. 간단히 이천 년 동안의 믿음을 지울 수는 없소. 어떤 믿음도 속세의 형태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으로 믿음을 부술 수는 없소. 가톨릭교회는 바티칸 시국이 망하든, 안 망하든 계속될 것이오.”
“숭고한 거짓말이로군. 하지만 항상 같은 거짓말이지. 우리는 둘다 진실을 알고 있어. 말해보시오. 바티칸 시국이 왜 담장을 두른 요새일까?”
궁무처장이 대답했다.
“신의 사람들은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소.”
“당신은 얼마나 젊지? 바티칸은 요새요. 왜냐하면 그 담장 안에 바티칸 재산의 절반이 들어있기 때문이지. 진귀한 그림, 조각품, 평가절하된 보석, 값을 매길 수 없는 서적들… 그리고 바티칸 은행금고에는 금괴와 부동산 증서가 들어 있소. 바티칸 시국 안에 이런 재산들을 어림잡아 계산하면 약 사백팔십오억 달러에 이르지. 당신은 꽤나 괜찮은 밑천 위에 앉아 있는 거요. 물론 내일이면 모두 재가 될 테지만, 어쨌든 그건 청산해야 할 부채나 마찬가지니까. 바티칸은 파산하는 거요. 아무리 성직자라 해도 무(無)를 위해 일할 수는 없지.”
총알을 맞은 듯한 올리베티와 궁무처장의 표정은 남자의 긴 발언이 정확하다는 것을 반영하였다. 랭던은 가톨릭교회가 그런 거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지, 일루미나티가 그에 관해 알아낸 것이 놀라운지 분간이 힘들었다.
궁무처장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아니라 믿음이 이 교회의 중추요.”
남자가 말했다.
“거짓말이 느는군. 지난해 바티칸은 전 세계의 비틀거리는 교구를 지원하기 위해 일억 팔천만 달러를 썼소. 사람들의 교회 참석율은 항상 낮아지고 있지. 지난 십 년 동안 사십육 퍼센트가 감소했으니까. 기부금은 칠 년 전에 거둬들인 금액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 신학교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들고, 당신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교회는 죽어가고 있소. 이번 일을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고려해보시오.”
올라베티가 나섰다.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이제야 느낀 듯 호전적인 기운이 덜해 보였다. 올리베티는 출구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떤 출구라도 좋았다.
“금괴로 네 동기를 사겠다면 어떻게 하겠나?”
“양쪽 모두를 모욕하지 마시오.”
“우리에겐 돈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요. 당신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순간 랭던은 사람들이 일루미나티의 재산이라고 단언하는 것을 떠올렸다. 바이에른 석공들이 남긴 고대의 부(富), 로스차일드 가, 빌더버그 그룹의 회원들, 전설적인 일루미나티의 다이아몬드 (로스차일드 가:유대계의 세계적인 금융재벌, 빌더버그 그룹:1954년 네덜란드 빌더버그 호텔에서 처음 모임을 가졌다 하여 빌더버그 그룹이라 부른다. 이 모임은 프리메이슨 조직의 단합회의로 알려져 있다.)
“발탁된 후보자들. 추기경들을 아껴주시오. 그분들은 늙었소. 그분들은…”
화제를 바꾸어 궁무처장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애원조였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웃었다.
“순결한 희생이오. 말해보시오. 당신은 그들이 정말로 동정남(童貞男)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들이 죽을 때 어린 양들이 우는 소리를 낼까? 과학의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순결한 희생이라 생각하라고.”
오랫동안 궁무처장은 침묵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분들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오.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않을 거요.”
전화를 건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레오나르도 베트라도 믿음을 가진 인간이었지. 하지만 어젯밤 내가 그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두려움이었어. 내가 제거해준 것은 두려움이지.”
잠자코 있던 비토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몸은 증오로 팽팽해졌다.
“이 망할 자식! 그분은 내 아버지야!”
스피커를 통해서 킬킬거리는 웃음이 메아리쳤다.
“네 아버지? 이건 또 뭔가? 베트라에게 딸이 있었다? 마지막에 당신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질질 짰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정말 불쌍했지. 애처로웠어.”
살인자의 말에 한방 맞은 듯 비토리아가 뒤로 비틀거렸다. 랭던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비토리아는 금세 평정을 회복하고 검은 눈동자를 전화기에 고정시켰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어.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당신을 찾아내겠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찾아냈을 땐…”
그녀의 목소리는 레이저처럼 날카로웠다. 살인자는 투박하게 웃었다.
“영혼을 가진 여자라. 이 몸을 흥분시키는군. 아마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내가 너를 찾겠지. 그리고 너를 찾으면…”
그 말들은 칼날처럼 덮쳐왔다. 그런 뒤에 남자는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