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이 막’
어두컴컴한 터널을 걸어가며 암살자는 생각했다.
사내의 손에 들린 횃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횃불은 효과적이다. 모든 것에 효과적이다. 사내는 두려움이 자신의 동지라는 것을 배웠다.
‘두려움은 전쟁의 어떤 수단보다 상대를 빨리 무능하게 만든다.’
통로에는 자신의 변장을 감탄하며 바라볼 거울이 없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외투 그림자가 자기 모습이 완벽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침투는 계획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건 이 음모의 일부이다. 사내는 자신이 이런 역할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주 전이었으면 지금 이 터널 끝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임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자살과도 같은 사명. 벌거벗긴 채 사자 우리 속으로 들어가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누스는 불가능의 정의를 바꿔버렸다.
지난 2주 동안 야누스가 암살자와 공유한 비밀은 무수히 많았다. 이 터널도 그런 비밀 중 하나였다. 고대의 터널, 하지만 지금도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다.
적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암살자는 안에서 자기가 해야 할 임무가 야누스의 약속처럼 쉬운 일일지 궁금했다. 야누스는 안쪽의 누군가가 필요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에게 다짐했다.
‘내부에 공모자가 있다. 믿을 수 없어.’
자기의 임무를 생각하면 할수록 암살자는 그 일이 아이들 장난처럼 여겨졌다.
‘와하드(wahad)… 틴타인(tintain)… 탈라타(thalatha)… 아르바(arbaa)…’
터널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암살자는 아랍 어로 숫자를 읊었다.
하나… 둘… 셋… 넷…
“랭던 씨, 반물질에 대해서 들어보셨죠?”
비토리아가 랭던을 관찰하며 물었다.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백색의 실험실 내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랭던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네. 글쎄… 어느 정도.”
희미한 미소가 비토리아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타트렉> 보셨죠?”
랭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글쎄, 제 학생들은 즐겨보는 것 같습니다만…”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U.S.S. 엔터프라이즈 호의 연료가 반물질 아닙니까?”
비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과학영화는 훌륭한 과학에 뿌리를 두지요.”
“그럼 반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겁니까?”
“자연의 한 가지 사실이죠. 모든 것은 그에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어요. 양자는 전자를 가지고 있고, 상위 쿼크는 하위 쿼크를 가지고 있죠.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단계에는 보편적인 상대성이 있답니다. 물질이 양(陽)이라면 반물질은 음(陰)인 셈이죠. 물리학적인 등식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거예요.”
랭던은 이중성에 대한 갈릴레이의 믿음이 떠올랐다.
비토리아가 계속 말했다.
“1918년 이후,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물질이 빅뱅에서 창조되었음을 알았어요. 하나는 바위와 나무와 사람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물질입니다. 다른 하나는 물질의 반대이죠. 구성입자가 반대의 전하(電荷)를 띤다는 점만 제외하면 물질과 모든 면에서 동일해요.”
안개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콜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반물질을 저장하려면 엄청난 기술적 장벽이 있네. 가령 중성화 문제는 어떤가?”
“아버지는 반물질이 자연붕괴하기 전에 가속기에서 반물질의 양전자를 끌어내는 상반된 극성진공장치를 개발하셨어요.”
콜러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공은 물질도 끌어낼 수 있어. 입자들을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야.”
“아버지는 자기장을 응용하셨어요. 물질은 오른쪽으로 호를 그리고, 반물질은 왼쪽으로 호를 그리죠. 그 둘은 양(兩)극성을 띠니까요.”
그 순간 콜러가 품은 의심의 벽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놀란 얼굴로 콜러는 비토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 후 예고도 없이 발작 같은 기침이 쏟아졌다.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입술을 훔치며 콜러가 내뱉었다. 소장의 논리는 아직도 비토리아의 설명에 저항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공장치가 작동한다 해도, 보관용기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네. 반물질은 물질로 만들어진 용기에 보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반물질이 물질과 접촉하면 즉시…”
“표본은 보관용기에 닿지 않습니다.”
분명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비토리아가 대답했다.
“반물질은 부양(浮揚) 상태예요. 아버지와 저는 저 보관용기를 ‘반물질 트랩’이라고 불렀어요. 트랩이라는 말 그대로, 저 용기는 반물질을 중앙에 잡아두고 있어요. 보관용기 바닥과 둘레에서 안전한 거리만큼 반물질이 떨어져 있게 만들었거든요.”
“부양? 하지만… 어떻게?”
“교차하는 두 개의 자기장 사이에요. 자, 여기, 한번 보세요.”
실험실을 가로질러간 비토리아가 커다란 전자기구 하나를 가져왔다. 랭던은 그 기묘한 장치를 보고 만화에 나오는 광선총을 떠올렸다. 기관총처럼 넓은 총신 위에는 조준망원경이 달렸고, 아래에는 여러 전자장치가 얽혀 있다. 비토리아는 기구의 조준망원경을 보관용기 하나에 맞췄다. 그리고 접안렌즈를 들여다보며, 몇몇 손잡이를 이리저리 조정했다. 그런 다음 뒤로 물러나서 콜러에게 들여다보라고 했다.
콜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볼 수 있을 만큼의 양을 모은 건가?”
비토리아가 대답했다.
“오천 나노그램. 수백만 개의 양전자를 함유한 액상의 플라스마예요?”
“수백만? 하지만 어디에서건… 누구나 고작해야 입자 몇 개만을 얻었을 뿐인데.”
비토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크세논. 아버지는 전자를 벗겨내면서, 크세논 사출구를 통해 입자를 가속했어요. 아버지는 그 정확한 과정을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계속 고집하셨지요.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은 가속기에 정제하지 않은 전자를 주입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어요.”
콜러와 비토리아의 대화가 과연 영어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랭던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콜러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마의 주름만 더욱 깊어졌다. 갑자기 격한 숨을 내쉬더니 몸이 총에 맞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기술적으로는 상당히…”
비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은 양을 얻었어요.”
콜러는 앞에 놓인 보관용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접안렌즈에 눈을 갖다댔다. 콜러는 조용히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자리에 앉았을 때, 그의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얼굴의 주름이 사라졌다. 그는 속삭였다.
“세상에… 자네가 정말로 해냈군.”
비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해내신 거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비토리아가 랭던에게 돌아섰다.
“보고 싶으세요?”
그녀는 전자기구를 가리켰다.
무엇을 보는 건지도 모른 채, 랭던은 앞으로 나아갔다. 60센티미터 떨어진 곳의 반물질 트랩은 투명한 깡통처럼 텅 비어 보였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아주 극미한 것이다. 랭던은 접안렌즈에 눈을 갖다댔다. 이미지에 집중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뒤에 랭던은 보았다. 그의 생각처럼, 물체는 보관용기 바닥에 있지 않았다. 중앙에서 떠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허공에 떠있었다. 액체 상태의 빛나는 수은 방울 같았다. 마치 마술의 힘으로 떠있는 것처럼 공중에서 물방울이 구르고 있었다. 물방울 표면에 금속성의 잔물결이 이는 것이 보였다. 부양한 액체방울은 랭던이 비디오에서 보았던 무중력 상태의 물방울을 연상시켰다. 보관용기 안의 액체방울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보일 만큼 미세했지만, 지금 랭던은 플라스마 방울이 공중에 떠서 천천히 구름 때의 모든 파동과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이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랭던이 말했다. 비토리아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떠다니는 것이 좋은 거예요. 반물질은 극도로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에너지 면으로 보자면, 반물질은 물질의 거울과도 같아요. 만일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접촉하면, 이 둘은 즉시 서로를 상쇄시키지요. 반물질을 물질과 분리하는 것, 이게 도전과제예요. 물론 지구상의 모든 것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죠. 반물질은 무엇과도 접촉하지 않게 보관해야 한답니다. 심지어 공기와 접촉해서도 안 되죠.”
랭던은 감탄했다.
‘진공 상태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얘기로군.’
“이것이 반물질 트랩인가?”
파리한 손가락으로 보관용기를 어루만지며 콜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감탄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것은 레오나르도 박사의 구상인가?”
비토리아가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콜러가 고개를 들었다. 비토리아의 목소리에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버지는 반물질의 첫 입자를 만들어냈지만, 어떻게 그것을 저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것을 제안했죠. 양끝에 서로 대립하는 전자석을 가진 밀폐된 나노합성 용기.”
“아버지의 천재성이 자네에게도 이어진 것 같군.”
“아니에요. 저는 이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얻었어요. 고깔해파리는 전기 충전된 가시세포를 이용해서, 촉수 사이에 물고기를 가둬놓지요.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겁니다. 각각의 트랩 안을 교차하면서, 그 중간에 반물질을 잡아두는 겁니다. 진공상태의 가운데에 머물게 하는 거죠.”
랭던은 다시 보관용기를 쳐다보았다. 어느 것에도 접촉하지 않고 진공상태에서 떠도는 반물질. 콜러의 말이 옳았다. 그것은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자석을 위한 파워 소스는 어디에 있나?”
콜러가 물었다. 비토리아가 손으로 가리켰다.
“트랩 밑의 기둥속에요. 트랩은 아래의 기둥에 나사처럼 박혀 있어요. 그리고 트랩의 자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재충전되죠.”
“만일 자기장이 사라지면?”
“분명한 것은 부양상태를 벗어난 반물질이 트랩 바닥에 부딪히겠죠. 그럼 우리는 소멸을 보게 되고요.”
랭던은 귀를 곧추 세웠다.
“소멸?”
이 단어의 어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비토리아는 태평해 보였다.
“그래요. 만일 반물질과 물질이 서로 접촉하면, 양쪽은 즉시 파괴되요. 물리학자는 그 과정을 ‘소멸’이라고 부르죠.”
“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자연의 가장 단순한 반응이예요. 물질의 입자와 반물질의 입자가 합쳐지면 두 개의 새로운 입자를 방출하는데, 광자(光子)라고 하는 거죠. 광자는 아주 작은 빛 뭉치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랭던은 빛의 입자인 광자에 대한 글을 전에 읽었다. 광자는 에너지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했다. 랭던은 비토리아에게 <스타트랙>에 나오는 커크 사령관이 클린곤 제국을 공격할 때 광자 어뢰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자제했다.
“그럼 만일 반물질이 바닥에 떨어지면, 우리는 작은 빛 뭉치를 보게 되는 겁니까?”
비토리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이 말하는 ‘작다’라는게 얼마나 작은 것이냐에 달렸죠. 여기, 제가 보여드리죠.”
비토리아가 트랩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충전기둥에서 트랩을 돌려 빼기 시작했다. 갑자기 콜러가 공포의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비토리아의 손을 쳐내면서 외쳤다.
“비토리아! 지금 미쳤나!”
믿을 수 없게, 말라비틀어진 허약한 두 다리를 흔들며 콜러가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토리아! 트랩을 빼선 안 돼!”
소장의 갑작스런 패닉 상태에 당황하며 랭던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콜러가 말했다.
“오백 나노그램! 만일 자기장이 사라진다면…”
“소장님. 안전합니다. 모든 트랩은 이중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요. 충전기둥에서 빼낼 경우를 대비해 백업 배터리가 트랩에 들어 있답니다. 제가 트랩을 기둥에서 빼내더라도, 표본은 부양 상태를 유지해요.”
비토리아가 안심시켰다. 콜러는 안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못해 휠체어에 도로 앉았다.
비토리아가 말했다.
“이 배터리는 자동으로 작동하게 만들었어요. 트랩을 충전기둥에서 빼내면 바로 작동하죠. 배터리는 24시간용이에요. 잠수할 때 쓰는 가스 보관 탱크처럼요.”
랭던의 불안을 알아차린 듯 비토리아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랭던 씨, 반물질은 아주 놀라운 특성이 있답니다. 그 특성이 반물질을 위험한 존재로 만들기도 하죠. 반물질 십 밀리그램은 모래 한 알 정도 크기랍니다. 모래 한 알 정도의 반물질이 현재 사용하는 로켓 연료의 이백 톤, 그러니깐 이십만 킬로그램과 맞먹는 에너지를 보유한다는 게 학계의 가설이에요.”
랭던은 머리가 핑 돌았다.
“반물질은 미래의 에너지원(源)이에요. 핵에너지보다 천 배는 강력하죠. 백 퍼센트 효율에 부산물도 없고, 방사능도 없습니다. 오염물질도 물론 없지요. 몇 그램의 반물질이 큰 도시의 한 주 동안의 전력 공급을 담당할 수 있답니다.”
“그램이라고요?”
랭던은 불안하게 충전기둥에서 물러섰다. 비토리아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여기 있는 표본은 그램보다 훨씬 적은 양이니까. 그램의 수백만 분의 일이나 될까.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편이죠.”
비토리아는 다시 트랩에 손을 뻗어 충전기둥에서 나사처럼 돌려 빼냈다. 콜러는 몸을 뒤척였지만 간섭하지는 않았다. 트랩이 충전기둥에서 자유로워지자,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렸다. 트랩 밑 부분의 작은 LED(Light Emitting Diode)화면이 작동하면서, 빨간 숫자가 깜박거렸다. 숫자는 24시간에서 아래로 초를 세어나갔다.
24:00:00
23:59:59
23:59:58
랭던은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반물질 보관용기인 트랩이 불안한 시한폭탄처럼 생각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비토리아가 설명했다.
“배터리는 24시간 동안 작동합니다. 충전기둥에 트랩을 다시 갖다놓으면 재충전할 수 있어요. 트랩의 충전 배터리는 안전장치로 만든 것이지만, 운반할 때도 편리하죠.”
“운반?”
번개를 맞은 듯 놀란 표정으로 콜러가 쳐다보았다.
“이 물건을 실험실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고?”
“물론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동성은 우리가 연구하기 편하도록 해주죠.”
비토리아가 랭던과 콜러를 실험실 끝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커튼을 잡아당기자 창문이 드러났다. 창문 너머에 커다란 방이 있었다. 벽과 천장과 바닥 모두 강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그 방은 랭던에게 석유 수송선의 석유탱크를 연상시켰다. 몸에 낙서처럼 그려진 한자 문신을 연구하러 파푸아뉴기니에 갈 때 그는 석유 수송선을 탔었다.
“이 방은 소멸 탱크입니다.”
비토리아가 설명했다. 콜러가 올려다보았다.
“실제로 소멸을 관찰했나?”
“아버지는 빅뱅 물리학에 푹 빠져 계셨죠. 물질의 아주 작은 핵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
비토리아는 창문 아래에 있는 강철 서랍을 끌어당겨, 서랍 안에 트랩을 넣고 닫았다. 그런 다음 서랍 밑에 있는 조종간을 당겼다. 잠시 후에 트랩이 유리창 반대편에 나타났다. 트랩은 크게 호를 그리며 금속 바닥을 부드럽게 굴러가다가, 방 중앙에 이르렀을 때야 멈춰 섰다.
비토리아는 긴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분은 지금 반물질과 물질의 소멸을 처음으로 목격하시는 겁니다. 일 그램의 몇 백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상대적으로 극미한 표본이죠.”
랭던은 거대한 방 안에 홀로 있는 반물질 트랩을 쳐다보았다. 콜러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창문을 지켜보았다.
비토리아가 설명했다.
“보통은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이십사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만, 이 방은 트랩의 자성을 덮어씌울 수 있는 자석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반물질을 부양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있죠. 그리고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접촉할 때…”
“소멸…”
콜러가 속삭였다. 비토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반물질은 순수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질량을 백 퍼센트 광자로 전환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트랩을 똑바로 바라보지 마세요. 눈을 다칠 수도 있으니까.”
랭던은 걱정스러웠지만 비토리아가 과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트랩을 똑바로 보지 마라?’
트랩은 초강화 플렉시 유리 창문 너머로 27미터 이상 떨어졌다. 게다가 극히 미세한 트랩 속의 표본은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랭던은 생각했다.
‘눈을 다칠 수도 있다고? 저 작은 것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기에…’
비토리아가 버튼을 눌렀다.
즉각 랭던의 시력이 멀고 말았다. 트랩에서 뻗어 나온 환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면 빛의 충격파 속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벽력과도 같은 힘이 창문에 부딪혔다. 폭발이 실험실을 뒤흔들 때, 랭던은 뒤로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환한 빛은 모든 것을 태우고, 마치 스스로 회귀하는 것처럼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먼지처럼 소멸되어 아무것도 안 남았다. 랭던은 눈에 아픔을 느끼며,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력을 회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까맣게 그을린 방을 둘러보았다. 바닥의 트랩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증발 해버린 것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랭던은 경이로움에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하… 하느님.”
비토리아가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도 당신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죠.”
방금 목격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한 콜러는 새카맣게 타버린 방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 옆에 있는 랭던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요. 여러분께 실험실을 보여드렸으니, 이제 아버지를 보고 싶어요.”
비토리아가 요구했다. 콜러는 비토리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비토리아, 왜 이렇게 지체한 건가? 자네와 레오나르도 박사는 이 발견에 대해 즉시 내게 알렸어야 했어.”
비토리아는 콜러를 응시했다.
‘얼마나 많은 이유를 원하나요?’
“소장님, 우리는 나중에라도 이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은 아버지를 보고 싶어요.”
“이 기술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비토리아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CERN의 수입. 상당한 액수가 되겠죠. 이제 저는…”
“그게 비밀로 붙인 이유인가?”
콜러가 물었다. 그녀를 아버지가 아닌 다른 화제로 유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사회가 내가 이 기술을 라이센스에 붙이는 투표를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인가?”
콜러와 논쟁에 휩쓸리는 자신을 느끼며 비토리아는 되쏘았다.
“이 기술을 당연히 라이센스를 받아야 해요. 반물질은 중요한 기술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기술이기도 해요. 아버지와 저는 그 과정을 좀더 가다듬고, 안전하게 만들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중한 과학을 금전적인 탐욕 앞에 내세우려는 이사회를 믿지 못했다는 얘기로군.”
비토리아는 콜러의 어조에 담긴, 개의치 않는 반응에 놀라며 응수했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반물질이 적절한 빛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 기술을 알리기를 원했어요.”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요?’
“에너지에서 물질이 만들어진다? 무에서 뭔가가 나온다? 이런 얘기는 창세기가 과학적 가능성을 바탕에 두고 씌어졌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되니까요.”
“그럼 레오나르도 박사는 자신의 발견에 담긴 종교적 암시가, 상업주의의 난도질에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인가?”
“요약하자면 그래요.”
“그럼 자네는?”
아버지와는 모순되게, 비토리아의 관심은 다소 반대 입장이었다. 상업주의는 새로운 에너지원의 성공을 위해서 중요했다. 반물질 기술은 효율적이고 비오염 에너지원이라는 뛰어난 잠재성을 가졌지만, 세상에 성급하게 소개했다가는 핵과 태양열에너지를 죽인 정책과 홍보부족이라는 재앙을 겪을 위험에 있었다. 핵에너지의 경우 안전성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원자력 발전소가 급격히 증가했고, 결국 사고가 잇따랐다. 태양열에너지도 효율성을 갖추기 전에 급히 늘어나다가 투자자의 돈만 거덜냈다. 두 기술 모두 나쁜 명성을 얻었고, 제대로 열매를 맺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것이다.
“제 관심은 과학과 종교의 결합과는 약간 다른 거예요.”
비토리아가 말했다.
“환경이로군.”
알고 있다는 듯 콜러가 불쑥 내뱉었다.
“제한 없는 에너지. 광산을 더 이상 파낼 필요도 없고, 오염도 더 이상 없습니다. 방사능도 없고요. 반물질 기술은 지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파괴할 수도 있지.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걸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어.”
콜러가 빈정댔다. 비토리아는 불편한 콜러의 몸에서 풍기는 냉기를 느꼈다. 콜러가 물었다.
“이 일에 관해 누가 알고 있나?”
“아무도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아버지가 왜 살해되었다고 생각하나?”
비토리아의 근육이 긴장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소장님도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여기 CERN에도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반물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준비가 될 때까지 몇 달 동안은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고 맹세했거든요.”
“그러면 비토리아. 자네는 아버지가 침묵의 맹세를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나?”
이제 비토리아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그보다 더한 맹세도 지켜오신 분이에요!”
“그럼 자네가 누구에게 말한 일은 없고?”
“물론 없습니다!”
콜러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음에 꺼낼 말을 신중하게 고르듯이 잠시 말을 멈췄다.
“누군가 알아냈다고 가정해보게. 그리고 실험실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치자고, 그들이 무엇을 찾으러 왔을까? 레오나르도 박사가 공책 같은 것을 여기에 두진 않았을까? 과정을 담은 기록이라든가?”
“소장님, 저는 지금까지 잘 참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답이 듣고 싶어요. 소장님은 계속해서 누가 실험실에 침입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소장님도 망막 스캔을 보셨잖아요. 아버지는 비밀과 보안 유지에 계속 신경을 쓰셨어요.”
“내 비위를 좀 맞춰주게.”
비토리아를 놀래키며 콜러가 냉큼 말을 받았다.
“만일 뭐가 없어진다면, 어떤 것이 없어질 것 같나?”
“잘 모르겠어요.”
비토리아는 화가 난 채로 실험실을 쓰윽 둘러봤다. 침입자라면 반물질 표본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험실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비토리아가 선언했다.
“아무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여기 위에 있는 것은 모두 괜찮아 보입니다.”
콜러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여기 위라고?”
비토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여기는 위층 실험실이에요.”
“그럼 아래층도 실험실로 사용한다는 말인가?”
“창고로요.”
다시 기침을 하며 콜러는 비토리아에게 다가갔다.
“지금 위험물질 보관실을 창고로 사용했다고 했나? 무슨 창고로?”
‘당연히 위험물질 보관창고지, 무슨 창고는!’
비토리아는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반물질입니다.”
콜러가 팔걸이 위로 몸을 들썩거렸다.
“아래층 실험실에 다른 표본이 있다는 겐가? 왜 그 얘기는 하지 않았나!”
비토리아도 맞받아쳤다.
“지금 방금 했잖아요! 그리고 소장님은 제게 말할 기회를 주시지 않았잖아요!”
“거기 있는 표본도 조사해봐야겠군. 지금 당장.”
비토리아가 콜러의 말을 수정했다.
“아래층 실험실에 있는 반물질은 단 하나예요. 그리고 안전하고요. 아무도 거기에…”
“단 하나? 왜 여기 위층으로 올려놓지 않고?”
콜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버지는 조심하려고 그 표본을 기반암 아래에 두셨어요. 그 표본은 다른 표본들보다 크거든요.”
비토리아는 콜러와 랭던 사이에 오고 간 경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콜러가 다시 비토리아에게 휠체어를 몰고갔다.
“오백 나노그램보다 큰 표본을 만들었다는 얘기인가?”
비토리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와 저는 투입, 산출의 분기점을 안전하게 넘어설 수 있는지 증명해야 했거든요.”
새로운 연료에 대한 질문은 항상 투입 대 산출의 문제라는 것을 비토리아는 알고 있었다. 연료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가? 단 1배럴의 석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업이 되는 것이다. 반물질도 같은 식이다. 조그마한 반물질 표본을 구하기 위해 26킬로미터짜리 가속기에 불을 붙이려면, 실험 결과인 반물질이 함유하는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했다.
반물질이 효과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많은 양의 반물질 표본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큰 반물질 표본 창조를 주저했지만, 비토리아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세상이 반물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두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비용 대비 효과가 높은 양이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반물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를 설득했고, 베트라 박사는 자신의 판단을 접고 비토리아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비밀과 보안 유지에 관해서 확고한 가이드라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트라 박사는 반물질을 위험물질 보관실에 보관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위험물질 보관실은 지하로 23미터 더 내려간 곳에 있는 작은 화강암 공동(空洞)이었다. 큰 표본은 그들의 비밀이었고, 오직 두 사람만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긴장된 목소리로 콜러가 물었다.
“비토리아? 레오나르도 박사와 자네는 얼마나 큰 표본을 만들어낸 건가?”
비토리아는 자기 안에서 교활한 즐거움을 느꼈다. 아래층 실험실 표본은 위대한 막시밀리안 콜러라 할지라도 쓰러지고 말 크기임을 알고 있었다. 비토리아는 아래층에 있는 반물질을 그려 보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트랩 속에 떠있는 작은 반물질 구슬은 맨눈으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었다. 이 구슬은 트랩 속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이것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작은 조각이 아니었다. 작은 비비탄 총알만 했다.
비토리아는 숨을 깊은 들이마셨다.
“사분의 일 그램입니다.”
콜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기침이 쏟아졌다.
“뭐라고! 사분의 일 그램? 그건 거의… 5킬로톤에 맞먹는 거잖아!”
‘킬로톤이라.’
비토리아는 이 단어를 싫어했다. 아버지와 그녀가 절대 쓰지 않는 단어였다. 1킬로톤은 TNT 1천 톤과 같은 양이다. 킬로톤은 무기류에 쓰이는 말이고, 폭탄을 탑재할 때 그 용량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에는 파괴적인 힘을 과시하는 냄새가 났다. 그녀와 아버지는 건전한 에너지 산출용어인 전자볼트와 줄(Joule)로 말했다.
“그 정도의 반물질 양이라면 말 그대로 반경 팔백 미터 내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양일세!”
콜러가 소리쳤다.
“그렇죠. 즉시 소멸된다면, 하지만 아무도 그런 짓은 못해요!”
비토리아가 되받았다.
“모르는 게 약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겠지. 아니면 여기 전원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콜러는 이미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예비 전력과 충분한 보안시스템이 갖춰진 위험물질 보관실에 두신 거예요.”
희망적인 얼굴이 되어 콜러가 돌아보았다.
“위험물질 보관실에 추가적인 보안장치를 해놓았다는 소린가?”
“그럼요. 두 번째 망막 스캔.”
콜러는 단 두 마디만 했다.
“당장 아래층으로.”
화물엘리베이터는 바위처럼 빠르게 내려갔다. 지하로 23미터 더 내려가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깊이 내려가자, 비토리아는 두 남자가 뭔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보통 때는 감정이 없는 콜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비토리아는 생각했다.
‘그 표본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엘리베이터가 바닥에 닿았다. 문이 열리자, 비토리아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복도로 그들을 안내했다. 복도 안쪽은 거대한 강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위험물질 보관실.
위층 실험실 문에 붙은 것과 동일한 망막스캔 장치가 여기에도 있었다. 비토리아는 문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렌즈에 눈동자를 맞췄다. 비토리아가 뒤로 물러섰다. 뭔가 잘못되었다. 보통 때는 먼지 하나없이 깨끗한 렌즈에 뭔가 묻어 있다. 물방울이 튄 것처럼 보이는데…
‘피?’
당황하며 비토리아는 두 남자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닿은 것은 딱딱하게 굳은 남자들의 얼굴이었다. 콜러와 랭던, 두 사람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녀 발치의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비토리아의 눈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움직였다.
“안 돼!”
비토리아에게 다가가며 랭던이 고함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비토리아의 시선이 바닥에 있는 물체에 사로잡혔다. 그 물체는 비토리아에게 너무나 낯설고도,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단 한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공포가 밀려오고, 비토리아는 깨달았다. 바닥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 한 조각의 쓰레기처럼 버려진 그것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눈동자 어딘가에 개암나무색 그늘이 져 있음을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