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폴 오스본의 어머니는 그때까지 살던 집을 떠나 케이프 코드에 있는 언니의 조그만 이층집으로 옮겨갔다.

 

그의 어머니는 베키라고 불렸는데, 오스본은 그것이 엘리자베스나 레베카를 줄인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폴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었을 때 그녀는 겨우 스무 살이었고, 아직 간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조지 데이비스 오스본은 잘생긴 남자였지만,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 그는 MIT(매사추세츠 주립 공과대학)에 다니기 위해 시카고에서 보스턴으로 유학을 왔었고, 졸업을 하자 곧 레이테온 사에 입사했다가 나중에는 하이테크 허브 가 128번지에 있는 소규모 엔지니어링 디자인 회사인 마이크로탑 사로 근무처를 옮겼다. 폴 오스본이 자기의 아버지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수술 기구를 디자인했다는 것뿐이었는데, 당시는 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보스턴 교외에 있던 큰 집에서 짐을 꾸려 가지고 케이프 코드에 있는 훨씬 더 작은 집으로 옮겨 갔다는 것과 바로 뒤이어 그의 어머니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두 사람이 먹을 저녁 식사를 마련해 놓고는, 그녀 몫의 음식은 차갑게 식도록 내버려둔 채 정신을 잃을 때까지 연거푸 칵테일을 들이키곤 하던 밤들을 기억했다. 또 그녀가 점점 더 취해갈수록 겁이 나서 어떻게든 음식을 먹게 하려고 애를 썼던 기억도. 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그러나 다음에는 그 분노가 늘 그에게로 돌려졌다. 그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만일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들은 케이프 코드에 있는 그 조그만 집에서 자기 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보스턴 교외의 크고 멋진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고 나면 분노는 언제나 살인자와 그들 앞에 남겨진 비참한 삶으로 돌려졌다. 그 다음에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경찰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경멸했다. 제대로 된 어머니도 못 되었고, 그런 비극의 후유증에 대처할 준비도,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폴의 이모인 도로시는 당시 마흔 살로 그녀의 동생보다 여덟 살이나 위였다. 단순하고 상냥한 마음씨에 지나치게 뚱뚱한 독신녀였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면서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했고, 폴과 베키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뒤로는 베키가 다시 일상의 삶에 매달리도록 돕기 위해 힘 닿는 데까지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녀가 교회에 다니고 또 간호 학교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친 후 간호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로시 이모는 군청에서 일하는 서기야.”

 

그의 어머니는 진저엘에 캐내디언 클럽을 섞은 칵테일을 마시면서 한탄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 네 이모가 아버지 없이 자식을 키운다는 두려움을 어떻게 알지? 열 살짜리 사내아이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아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돌봐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네 숙제는 누가 도와주지? 누가 네게 저녁을 만들어 주지? 네가 나쁜 아이들과 휩쓸리지 않도록 누가 지켜 주지? 도로시 이모는 그걸 이해하지 못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리고 계속 교회니 직장이니 정상적인 삶이니 하는 얘기만 하지.”

 

그러고 나서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근검절약해서 산다면 폴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아가기에 충분한 생명 보험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베키가 알지 못했던 것은 도로시가 얘기하려는 것이 교회와 직장과 새로운 삶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음주에 대해서라는 것이었다. 도로시는 그녀로 하여금 술을 끊게 하려고 했지만 베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조지 오스본이 죽은 지 여덟 달 사흘째 되던 날, 베키 오스본은 차를 몰고 번스타블 항구의 물 속으로 뛰어들어 익사할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막 서른셋이 되었을 때였다. 장례식은 1966년 12월 15일, 야머스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치러졌다. 그날, 하늘은 회색빛으로 흐렸고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장례식에는 폴과 도로시를 포함해서 스물여덟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 중 대부분은 도로시의 친구들이었다.

 

 

 

1967년 1월 4일, 폴 오스본이 열한 살 나던 해에 도로시 이모는 그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12일, 그는 뉴저지 트렌턴에 있는 남자아이들을 위한 공립 기숙 학교인 하트 위크로 들어갔다. 그 뒤로 7년 동안 그는 1년에 열 달을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