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한없는 적의가 어떻게 적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작동되는 것인지, 나는 늘 알지 못했다. 적들은 오직 죽기 위하여 밀어닥치는 듯했다. 임진년에 나는 농사를 짓듯이, 고기를 잡듯이, 적을 죽였다. 적들은 밀물 때면 들이닥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적들이 멀리 물러간 밤에, 나는 때때로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본 적이 없었고, 그의 모습은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 생포된 적의 장수들을 주리 틀고 지져서, 히데요시에 관한 소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일본 천하의 맹수가 다케다 신겐이라는 또다른 맹수의 진영을 모조리 죽이고 일본을 차지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의 칼에 죽었다. 그러자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정권의 수뇌부를 몰살하고 일본의 관백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 천하의 모든 창검과 총포와 군사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총집결했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는데 그 뜻은 무(武)를 천하에 펼쳐서 난세를 치세로 바꾼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천하포무 깃발을 인수했다. 히데요시는 스스로 천하인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그 천하포무는 조선과 명을 아울러서 가지런히 하는 것이며, 조선의 국토를 여러 봉토로 찢어서 일본 막부의 가신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히데요시의 전후 조선 경영 구상이라고 적장들은 실토했다.
히데요시는 그러하되, 물 위에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며 파도처럼 달려드는 그 무수한 적병들의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죽음의 물결은 충이나 무라기보다는 광에 가까웠다. 때때로 내 지휘의 위치가 진의 후미일 때 내 부하들의 창검에 풀처럼 베어져나가는 적병들의 모습과 깨어진 적선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던 피의 물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 죽음 너머에서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히데요시를 생각했다. 그때도 히데요시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히데요시는 또 다른 길삼봉이었다.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싸움이 끝나는 저녁 바다 위에서, 전의가 잠들고 살기가 빠져나간 함대는 비로서 기진했고 노을 헤치며 모항으로 돌아가는 항해 대열은 헐거웠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
그해 봄에 충청도 부여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객기 많고 담력 좋은 건달이었다. 그의 군사는 사노, 승려, 피난민을 끌어모은 7백이었고 그가 부여를 장악했을 때 그의 무리는 1만이 넘었다. 그는 처음 군사를 끌어모을 때 의병 행세를 했다. 그때 김덕령은 진주에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있었다. 김덕령은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진주에서 남원 운봉까지 나아갔다. 그가 부여로 입성하기 직전에 이몽학은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반란군은 흩어졌다. 김덕령은 하릴없이 군사를 거두어 진주로 돌아갔다. 서울로 압송되어 간 반란 연루자들은 김덕령을 공모자로 끌어들였다. 김덕령의 부여 진압이 늦어진 까닭은 그가 이몽학과 내통하고 운봉에서 일부러 지체했다는 혐의가 성립되어 갔다.
도원수 권율은 진주로 돌아온 김덕령을 체포해서 하옥했다. 권율은 김덕령의 혐의 내용을 수사하지 않은 채, 김덕령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그때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이몽학이 처음에 의병을 가장했으므로, 임금에게 의병이란 뒤숭숭한 무리들이었다. 김덕령은 의금부에서 한 달 동안 여섯 번 심문을 받았다. 부러진 정강이에 거듭 주리를 틀었다. 마지막에 그는 무릎으로 기어서 형리 앞에 나아갔다. 그는 조용했고, 그의 진술은 논리가 맞았다. 그때 임금은 말했다.
“저놈이 형장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임금의 사직은 끝없이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고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이 죽기 이태 전, 갑오년 가을에 나는 거제도에서 김덕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김덕령은 진주에서 이겼고 담양에서 이겼다. 내가 보기에 그의 산발적인 승리는 전쟁의 국면을 전환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영남의 몇몇 고을을 온전히 지켜냈다. 거제도에서 만났을 때 김덕령의 풍모는 단아한 선비와도 같았다. 그의 담력과 기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 김덕령의 육군은 섬의 안쪽 고지에 진 친 적의 주력을 해안 쪽으로 내몰았고 나는 잔문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다로 몰려난 적들을 부수었다. 기다릴 때, 나는 포구에 묶인 적들의 배를 부수지 않았다. 적들은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잔문포에서 적들은 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김덕령을 잡아들일 때, 임금은
“덕령은 삼군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다. 누가 능히 이자를 묶을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발을 굴렀다고 한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풀려난 그는 한동안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은거하는 산이 구월산이라고도 했고 지리산이라고도 했다. 풍편에 그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가 땅 위의 곡식과 채소를 일체 끊고 안개를 마시고 개울물을 퍼먹으며 연명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미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우수영 침소의 안쪽 벽에 나는 교서를 걸어놓았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 망궐례를 올릴 때 나는 교서에 절했다.
“전하, 전하의 적들이 전하를 뵙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신은 결단코 전하의 적들을 전하에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적들은 전하의 적이 아니라 신의 적인 까닭입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서 아래서 잠 깨는 새벽마다 어둠 속에서 오한이 났고 식은땀이 요를 적셨다. 종을 불러서 옷을 갈아입을 때, 포구에 묶어둔 배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