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1598년 11월 19일에 파직당한 유성룡은 이튿날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22일에는 경기도 양근의 대탄에서 유숙했다. 용진과 합류하는 여강 하류였다. 유성룡은 용진 하류의 북쪽 언덕인 도미천에서 하마해 삼각산을 바라보고 네 번 절했다. 이 언덕을 넘으면 다시는 서울의 산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곳에서 시를 한 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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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은 중국 낙양 부근의 성인데, 여기에서는 서울 남산을 뜻한다. 《연보》는 이때 “주머니와 전대가 모두 텅텅 비어서 급히 고향집에 사람을 보내서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고 전한다. 전란 극복의 일등공신인 유성룡이 전란 종결과 동시에 파직당해 낙향한 것이다. 그가 낙향하는 도중에도 그의 삭탈관작 요구는 계속되었다.
12월 5일 유성룡은 태백산 아래 도심촌으로 가서 모친을 만났다. 만감이 교차했다. 다음 날 삭탈관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온 그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조가 정적으로 여기는 이상 관작이 회복될 기미는 없었다. 다른 꼬투리를 잡아 죽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이 전란 극복에 힘쓴 인물들은 유성룡의 삭탈관작에 분개했다. 선조 32년(1599) 초 명나라에서 돌아온 좌의정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항의했다.
“유성룡은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자신을 지키고 혈성으로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 홍여순 등의 참소를 좇아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일시의 착한 무리를 유성룡의 당이라고 하여 멀리하고 배척하시니, 신은 사림의 화가 이를 쫓아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는 또 경연에서도 유성룡을 재등용하도록 주장했다.
“오늘날 정승을 선택하는 데 유성룡 외에는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습니다.”
유성룡 재등용 주장이 거부되자 이원익은 자신도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선조가 만류했다.
“경은 종척(전주 이씨) 대신으로 나를 버리고 장차 초나라로 갈 것인가, 진나라로 갈 것인가.”
남인 이원익뿐만 아니라 서인 우의정 이항복도 유성룡의 삭탈관작에 크게 항의했다.
“의정부 아전이 옥당의 차를 전하므로, 신이 남에게 부축을 받아 억지로 일어나서 한번 보았는데, … 신은 다 읽지 못하고 놀라 스스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 이제 크게 화의를 배척하는 논의를 내걸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려고 하여 차례대로 화의를 말한 사람을 제거하려 하니, 마땅히 신도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항복은 유성룡을 처벌하려면 자신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 상소에서 이항복은 “신이 창졸간에 한때의 소견으로 전하 앞에서 대강을 진술한 바가 있고” 라고 말했는데, 이는 선조 자신도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는 힐난이다.
유성룡은 세상사를 잊기로 했다. 나라를 전란에서 구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준겸이 경상 감사가 되었다고 찾아오려고 하자 글을 보내 사양했으며, 고향 근처 군읍의 사대부들이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자 사람을 보내 말렸다. 선조 33년 1월 25일에는 옥연정사에 나아가 보허대에 소나무를 심었다. 충절의 상징 소나무를 심는 것으로 자신의 심경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의 「두문불출」 이란 글이 이를 말해준다.
《잡저》 「두문불출」
내가 근년에 와서 마음이 답답하고 쓸쓸한 병이 있어 강촌에서 문을 닫고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종사하고 있지만, 솥과 그릇은 닳아 이지러지고 평생의 업적은 수은처럼 녹아 흩어져 다시 갈라진 틈을 보충해 먹기를 바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심성을 수양하는 이 일이 아니면 시일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고생을 하고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감히 그만 둘 수가 없으니, 그래도 공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장 싫은 것은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지나가면서, 나의 조용한 심경을 부딪쳐 와서 헐어버리는 일이다. 매양 이웃에서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찾아와 무엇을 물으면 마지못해 대답은 하지만 마음이 매우 즐겁지 않다. 이런 일이 마음속에 쌓인 지가 오래되어 나쁜 버릇이 생겨서 남의 발소리만 듣게 되어도 곧바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두려워하게 되었다.
두문불출하며 사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세상이 싫어진 것이다. 유성룡은 이제 세상을 버렸다. 아니 선조를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조 34년(1601) 12월에 다시 서용의 명이 내려졌지만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청백리로 명선되었지만 역시 개의치 않았다.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 에서 “영의정 이항복이 선생의 이름을 우두머리에 적어놓고 동석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 어른의 성덕은 한 말로 일컬을 수 없으나 특히 사환 중 치부했다는 누명을 벗겨야 되겠기에 청백리로 뽑은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문홍도가 선생을 무고한 일을 말한 것이다” 라고 했다.
선조 36년(1603)에 다시 부원군으로 복귀되었으나 유성룡은 바로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선조가 주는 어떤 관작도 사양하기로 결심했다. 선조 37년 호성공신을 책봉하면서 유성룡을 2등공신으로 책봉했다. 문신이 주로 뽑힌 호성공신의 1등은 이항복 · 정곤수이며, 무신이 주로 뽑힌 선무 1등공신은 이순신 · 권율 · 원균이다. 원균은 당초 2등으로 의정했으나 선조가 우겨서 1등으로 올라갔다. 유성룡은 이 역시 상소해서 사퇴하는 동시에 공신녹권(공신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충훈부에서 화가를 보내 공신의 화상을 그려야 한다고 말하자 공신녹권에서 빼달라고 요청한 상태라며 그대로 돌려보냈다.
선조 38년(1605) 정월에 공신들이 모여서 회맹했는데, 유성룡은 물론 불참했다. 3월에 선조가 봉조하의 녹을 내렸으나 이 역시 사양했다. 선조는 이를 되돌려 보내면서 몇 차례 더 소명했으나 유성룡은 모두 거부했다. 선조도 유성룡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벼슬을 거부한다고 죄를 줄 수는 없었다. 유성룡은 선조의 양심에 돌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유성룡은 더 이상 세상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선조 40년(1607), 유성룡은 병이 중해졌고 4월부터는 병문안도 모두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편안하고 조용하게 조화로 돌아가련다.”
도인의 경지에 접어든 듯한 말이다. 평소에도 그는 “도(道)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말했다. 그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도의 완성에 둔 것이다. 그해 5월 6일, 유성룡은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년. 조선조 500년 최고의 명재상이라 평가받는 유성룡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정지하게 했는데 선조를 당혹하게 하는 일이 또 발생했다. 《연보》는 ‘사대부들이 성남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 고 전한다. 성남은 남산 남쪽을 뜻한다. 선조를 놀라게 한 것은 시민들이 조정에서 정한 일자보다 하루를 더 철시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다. 시민들은 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
허목의 「서애유사」 는 시민들이 4일간이나 시장 문을 닫고 “선생이 없었던들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가 황해도에서 소금을 구워 전라도에서 쌀로 바꾸어 도성에 공급하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사람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그가 대동법(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들이 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양반 사대부들과 싸우면 백성들 편에 서주던 재상이기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하루를 더 철시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삿날 사대부와 유생이 4백여 명이나 모였고, 졸곡이 지나도록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은 자도 있었다. 허목은 조정의 늙은 중신이나 숙장, 또는 오래된 관리들이 모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 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선조조의 중흥을 이룩하고서 부자, 형제 등 국민들이 서로 삶을 유지하며 호의호식하고 편안한 데 거처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바가 진실로 선생의 힘이 아니고서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
이듬해 2월 선조 이연도 세상을 떠났다. 저승에서 선조는 서애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