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호암 문일평은 「근교 산악사화」에서 유성룡의 서울 집이 묵사동이라며 “서애의 공적에 대해서 흔히 논평하기를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한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나 충무공을 추천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 한다” 고 말했다.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한 것은 매우 잘했지만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한 것은 잘못했다는 뜻이다.
이이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때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서애의 십만양병설 반대가 전국민적 상식이 된 데는 역사학자 이병도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가 《조선사대관(1948)》과 수정판 《국사대관(1955)》, 《한국사대관(1983)》에 거듭 이 사실을 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이는 선조에게 군사 10만을 양성하여 완급(緩急)에 대비하자는 것을 건의하여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10년을 넘지 못하여 토붕(흙이 무너짐)의 화를 당하리라 하였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의 일이니, 장래를 투시하는 그의 선견(先見)의 명(明)이 어떠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당시의 국왕 선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조신들 중에도 찬동 지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동료 중에 식견이 높은 유성룡까지도 무사한 때에 양병(養兵=군사를 기르는 것)은 도리어 화를 기를 뿐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당시 조신들이 얼마나 타성과 고식에 기울어졌던가를 추측할 수 있다.”
이병도 박사는 《한국사대관》 「참고」에서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해 장황한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본문에 말한 그의 십만양병설은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 소찬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이것이 설령 그의 만년지사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 이 건의에 반대하던 한 사람인 유성룡이 후일에 그 선견의 명을 추억하면서 ‘이(珥)는 진성인(眞聖人)이라’ 고까지 하였다 함은 역시 위의 행장에도 실려 있지만 유명한 이야기이다.”
십만양병설의 문제점은 이병도 박사가 말한 대로 ‘연월이 미상’ 하고 근거도 제자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 의지했다는 데 있다.
“일찍이 경연에서 율곡이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정승 유성룡이 ‘사변이 없는데도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어 모두가 편안에 젖어 있었으므로 경연에서 주대(奏對)하는 신하들이 다 선생(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다. 선생이 밖에 나와 성룡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속유(俗儒)들은 시무에 통탈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하였다. 임진란을 맞은 후에 유 정승(유성룡)이 조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보니 이 문성(율곡의 시호)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의 말을 채용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이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 을 주장했다는 국민적 상식의 근거가 되는 기록이다. 이후 십만양병설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 기술을 약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십만양병설은 《선조수정실록》 15년(1582) 9월 1일조에 ‘이이가 네 가지 시폐의 개정을 논한 상소문’ 기사 말미에 사관의 논평에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 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 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며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정작 이이의 상소문에는 10만 양병 운운이 한 자도 보이지 않고, 상소문 말미에 사관의 평으로 들어가 있는 것 역시 김장생의 글을 보고 쓴 것이다. 이이의 상소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신의도 여지없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신의로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려 하십니까? 지금 듣건대 조사(명나라 사신)가 곧 나온다는데 서도(평안도) 백성들은 이미 지탱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이이는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더라도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는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곡식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10만 상비군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상소에서 이이는 경연에서 자신이 무엇을 강조했는지를 언급한다.
어리석은 신이 늘 경연에서 아뢴 것은 공안을 개정하고 수령을 줄이고 감사를 구임(久任)시키는 세 가지였습니다.
이이가 경연에서 늘 주장한 것은 공안을 개정해 공납으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수령 숫자를 줄이고, 감사의 임기를 늘리는 세 가지였다. 10만 양병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개혁하지 아니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인구의 수와 개간된 토지가 옛날보다 반절이나 줄었는데도 공부(貢賦)의 징수는 오히려 전보다 극심합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되어 뿔뿔이 흩어져 떠나버렸으므로 백성이 더욱 적어지고 부역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러한 형세로 나간다면 백성들은 필시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이는 공납의 폐단을 시급히 개선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더욱 다그쳐 군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상소 어디에서도 이이는 10만 양병을 주장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면 ‘지금 백성 생활이 도탄에 빠졌는데 무슨 여력으로 10만 병사를 기르겠는가’ 라고 반대했을 선비가 이이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은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편찬한 《율곡연보》다.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國勢)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서 도성에 2만 명을 두고, 각도에는 1만 명을 두어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재능 있는 자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고 사변이 있으면 10만 명을 합하여 도성을 지키도록 하여 위급한 때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사변이 일어나 백성들을 몰아내 싸우게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큰일이 실패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유성룡 공이 불가하다면서, ‘무사한 때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경연의 신하들도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선생이 물러나서 유 공에게 말하기를 ‘속유는 진실로 시의에 통달하지 못해 그렇지만 공 또한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는 한참 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 공이 조정에서 감탄하기를 ‘이 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율곡연보》는 이이가 경연에서 이 주장을 한 때가 선조 16년(1583) 4월이라고 적고 있다. 선조 16년 4월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정확히 10년 전이다. 송시열이 편찬한 《율곡연보》는 이이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해와 달까지 정확히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은 선조 16년(1583) 4월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했지만 《선조실록》은 그 두 달 전에 이이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사방이 곤궁한데 당장 대적이라도 나타난다면, 비록 제갈량이 앉아 계략을 짜고 한신 · 백기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발하려 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 삼지 않겠습니까.
양병보다 양민에 주력해야 한다던 이이가 두 달 후에 느닷없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경우 선조가 “경은 두 달 전에는 다른 말을 하더니 갑자기 왜 다른 소리를 하는가?”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이는 도망간 군사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군사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훈련 방법에서는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십만양병설의 근거를 제시한 김장생은 인조 9년(1631)에 사망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21년(1643)부터 시작해 14년 만인 효종 8년(1657)에 완성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김장생 등은 서인들로부터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졌다. 송시열이 편찬한 《율곡연보》에 선조 16년 4월로 기록되어 있는 십만양병설이 《선조수정실록》에는 7개월 빠른 선조 15년 9월에 수록하면서 “이이가 일찍이” 라고 ‘15년 9월’ 이전인 것처럼 기록한 이유도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근거로 하다보니 생긴 착오들이다.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해서 임란의 참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는 김장생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장생이 만든 말은 이것뿐이 아니다. 김장생은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 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김장생은 정철의 행장인 《송강행록》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송강이 이미 위관에서 갈리고 나서 유 정승이 대신 맡아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잡아다 국문하여 극도로 형벌을 가해서 마침내 형장 아래서 죽게 만들었다. … 저 늙은 부녀자와 어린 자식을 유성룡이나 이양원 등 여러 사람들도 어찌 살리려고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그런 것이었다. 그런즉 이발 · 최영경을 죽인 죄를 공(정철)에게 모두 돌리는 것은 편벽되지 않은가? … 지금 공을 모함하고 미워하는 연소배들은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죽인 죄를 모두 공에게로 돌리고 있다. 모르고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줄 분명히 알면서도 오히려 시론(時論)에 아첨하여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있다.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정철의 뒤를 이어 위관이 되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을 유성룡이 죽였다는 주장이다. 김장생은 이 글에서 유성룡과 정철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공(정철)이 유성룡에게,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공(유성룡)은 어찌하여 죽였소?” 라고 묻자, 유성룡이 “공이라면 그 죽음을 구제할 수 있었겠소?” 라고 답했다. 공은 “나라면 능히 구제할 수 있었지요” 라고 답하자 유성룡이, “능히 그럴 수 있었을까?” 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인용해 사실인 것처럼 만드는 게 김장생의 특기다. 김장생은 《율곡행장》에서도 십만양병설 논의 때 이이가 유성룡에게, “그대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말하고, 나중에 유성룡이 “지금 보니 이 문성(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 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정철과 유성룡의 대화나 이이와 유성룡의 대활 모두 김장생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창작품이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형벌을 받은 날자는 선조 23년(1590) 5월 13일이다. 유성룡은 그해 4월부터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만나러 안동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5월 20일에는 정경부인 이씨를 군위에 장사지내고, 5월 29일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6월에 서울로 올라와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옥사할 때 유성룡은 안동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성룡은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은 적도 없다.
김장생은 북인의 종주인 남명 조식에 관해서도 비슷한 창작을 한 적이 있다. 김장생은 성운이 《남명행장》에서 “조식이 기대승을 크게 비판했다” 고 썼다고 주장했으나 성운은 《남명묘갈명》을 쓴 적은 있어도 《남명행장》을 지은 적은 없는데, 《남명묘갈명》에는 남명이 기대승을 비판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으니 이 역시 김장생의 악의적 창작인 것이다.
이처럼 반대 당파의 인물들에 대한 악의적 창작을 일삼은 김장생은 서인의 종주가 되어 성균관 문묘에까지 종사되고, 서인과 그 후 예인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그의 글에 대한 진위를 검증하는 것은 성역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론 계열의 역사학자들이 현재까지도 이를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면서 국민적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장생과 송시열이 스승 이이를 높이려는 마음은 긍정할 만하지만 없는 내용까지 창작하면서 높이는 것은 이이를 욕보이는 것이다. 이이와 유성룡은 불우한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상의했을 정도로 당파를 뛰어넘은 인물들인데, 이이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고 창작한 것은 반대당파에 대한 악의적 조작과 다름없다. 이 창작으로 인해 《율곡행장》에 기술된 다른 행적들도 의심하게 만든다면 이는 오히려 스승을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만 10년 전인 선조 15년에 네 가지 시폐에 대해 상소, 즉 「경장봉사」를 올려 대대적 개혁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개혁을 실시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이와 유성룡의 세계관은 공통점이 많다. 서얼들의 역사서인 《규사》에는 이이가 여러 차례 서얼 등용을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선조 15년의 「경장봉사」에서 공납제도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모두 훗날 유성룡에 의해 정책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이 무렵 이이는 10만 양병을 주장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국방문제에 대해서 무심했는가? 임란 전 유성룡만큼 국방문제를 강하게 피력한 인물은 찾기 어렵다. 《선조수정실록》 24년 10월 1일 조에는 유성룡의 국방정책 개혁안이 실려 있다. 조선의 국방체제를 제승방략체제에서 진관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성룡은 먼저 국초에 시행된 진관체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국초에는 각 도의 군병을 모두 진관에 나누어 소속시켰다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진관이 속읍을 물고기의 비늘처럼 잘 통솔하고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우선 경상도를 예로 들어 말하면 김해 · 대구 · 상주 · 경주 · 안동 · 진주가 6진이 됩니다. 그러다가 적군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대가 혹 패하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해 굳게 지켰으므로 여러 진이 연달아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선조 24년(1591) 10월은 일본의 침략 소문으로 전국이 뒤숭숭할 때다. 회례사로 조선에 온 평조신과 현소는 명나라를 공격하도록 길을 내주지 않으면 조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한 때가 7개월 전인 선조 24년 3월이다. 이때 유성룡이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제승방략체제와 진관체제는 무엇인가?
진관제도는 감사와 병사가 있는 주진과 첨절제사가 있는 거진, 고을 수령들이 주로 관할하는 제진으로 나뉜다. 거진을 중심으로 몇 개의 제진을 묶은 것이 진관이다. 형식상 도 내의 진관을 감사와 병사가 지휘하지만 실제로 각 진관은 독립적 방어 단위로 지방관의 책임 아래 자전자수한다. 경상도를 예로 들면 경상 감사가 상주 감영에서 경상도 전체를 방어하는 지역 총사령관이 된다. 경상도는 좌우도가 있는데 경상 좌도는 경상 좌병사가 울산 좌병영에서 지휘하고, 경상 우도는 경상 우병사가 창원 우병영에서 지휘한다. 경상 좌병영에는 경주 · 안동 · 대구 진관이 소속되어 있는데, 경주 진관 산하에는 울산 · 양산 · 영천 · 흥해 거진과 청하 · 영일 · 장기 · 동래 · 언양 등의 제진이 소속된다. 진관체제의 장점은 한 진관이 무너져도 다른 진관이 방어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다. 곧 경주 진관이 무너져도 안동 진관과 대구 진관이 방어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수군도 마찬가지다. 전라도를 예를 들면 전라 감사 휘하에 전라 좌수사와 전라 우수사가 있는데, 전라 좌수사는 오동포(지금의 여수)의 전라 좌수영에 사단본부를 두고, 전라 우수사는 해남의 전라 우수영에 사단본부를 꾸린다. 전라 우수사 산하에는 연대에 해당하는 임치도(함평) 진관과 제주 진관이 있고, 임치도 첨사는 대대에 해당하는 모금포 · 법성포 · 다경포 · 목포 · 어란포 · 군산포 등의 만호들을 지휘하는 식이다.
반면 제승방략은 유사시 각지의 수령이 관할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멀리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각 지방관은 평소에 배정된 지역까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중앙에서 온 경장의 지휘를 받는 체제다. 제승방략은 명종 10년(1555)의 을묘왜란 때 임시적으로 실시한 것이 제도로 굳어졌는데, 한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치명적 결점이 있다. 중앙에서 내려온 경장(도원수)이 한 번 패배하면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다.
또한 진관체제는 기본적으로 내 고장을 내가 지키자는 개념이다. 그러나 제승방략은 남의 고장을 지키러 고향을 버리고 출동하자는 개념이다. 누가 처자가 있는 고향을 버리고 남의 고장까지 싸우러 가겠는가? 게다가 제승방략은 서울에서 온 경장에게 지휘권을 준다. 전쟁에서 무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지형지물인데, 낯선 지역을 낯선 경장이 지휘하는 것이다. 유성룡은 이런 점을 우려했다.
유성룡은 제승방략체제의 이런 위험성을 예견하고 진관체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이다.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반드시 원군이 함께 동요하게 되고 장수가 없는 군사들은 들판에 먼저 모여 천 리 밖에서 올 장수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장수가 채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먼저 쳐들어올 경우 군사들의 마음이 먼저 동요될 것이니, 이는 반드시 패배할 방도입니다. 군사들이 일단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가 곤란하니, 이러한 때에 장수가 오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우겠습니까. 그러니 다시 조종조의 진관법을 정비하여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법이 없습니다. 진관법은 평시엔 훈련하기가 쉽고 유사시엔 소집할 수 있는가 하면 앞뒤가 서로 응하고 안팎이 서로 보완되어 ‘토붕와해’ 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으므로 매우 편리합니다.
임진왜란 6개월 전에 유성룡이 올린 이 상소에는 일본이 침략했을 때의 상황이 정확하게 예견되어 있다.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진다는 ‘토붕와해’ 는 송시열이 《율곡연보》에서 이이가 임란을 예견하고 한 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서애 유성룡의 말이다. 신립의 태도에서 보듯이 조선은 내일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어책은 한 번 패배해도 재기할 수 있는 진관체제다. 진관체제에는 한 진관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관이 방어에 나서는 동안 조정에서 여러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러나 제승방략체제는 서울에서 내려간 도원수가 패전하면 그것으로 전 국토가 ‘토붕와해’ 되는 것이다.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를 각 도에 내려 상의하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경상 감사 김수가, ‘제승방략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아뢰어 이 의논은 끝내 폐기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김수는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이기도 한데, 과연 김수의 유일한 반대로 폐기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때 유성룡의 주장대로 진관체제로 개편되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진관체제는 전운(戰雲)을 읽은 유성룡이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조헌같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양반 사대부들 대부분은 일본군이 침략하지 않으리라는 김성일의 말을 믿고 싶어 했다. 황윤길의 말대로라면 전쟁준비에 나서야 하니 싫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는 것이 최선의 전쟁준비였다. 자기 고장으로 적이 쳐들어오면 싸울 수밖에 없고, 다른 진관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짝 긴장해 전투준비에 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진관체제를 반대하는 현상에 대해서 개탄했다.
“진관의 수령된 사람도 또한 의욕적으로 일하는 것을 꺼리고, 목전의 편안함에 만족하여, 위임된 마을을 검찰하고 군정(軍政)을 정비하는 일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방치하였고, 감사 또한 독려하였다는 사실은 들리지 않았으며, 한가하게 시일만 보내었으니, 일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진관체제 개편도 무산된 상황에서 임진왜란은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