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 는 선조의 어명을 따르지 않은 상황에서 정유재란 소식을 접한 후에 열린 어전 회의의 기록이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
윤두수 : 이순신의 죄상은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시는 바이옵니다. 이번 일로(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가토 선단을 이순신이 부산으로 나아가 공격하지 않은 일) 전국 인심이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며, 소서행장이 가르쳐 주었는데도 나아가 잡지 않았으니, 설사 전쟁 중이라도 순신을 갈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가토를 잡기 위해 대선단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서 대기하는 것은 중세기 항해 원리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야간에는 반드시 인근 포구에 정박해야 하는데, 견내량 북쪽은 왜군들이 요소요소에 왜성을 쌓고 매복하고 있었다. 때문에 중간 기착지로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

 

또 가토의 선단이 동남풍이 불 때 대마도를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가토의 선단은 순풍을 업고 10여 시간 만에 부산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한산도를 출발한 조선 함대는 준(準)역풍을 안고 항해하는 것이므로 부산 앞바다까지는 무려 30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막상 도착한다고 해도 가토의 선단은 이미 방파제 안에 숨어버린 후일 터이니 소용이 없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 함대가 부산으로 간 사이 장문 · 영등 · 웅천 · 안골포 등지에 숨어 있던 왜군 함대가 퇴로를 차단하거나 한산도를 기습 공격할 소지가 있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
선조 : 내가 순신이란 위인을 잘 알지는 못하나 이번 일은 하늘이 기회를 주었는데도(고니시를 하늘이 보낸 사람으로 생각했다) 나아가 잡지 않았으니, 이 같이 군율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선조와 윤두수가 이순신을 해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기 위해 여론몰이 식 어전회의를 진행한 단면이다. 이 같은 어전회의 결과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하옥되었다.

 

● 통제사 이순신, 모함을 당하다

 

지금까지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죄인이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순신 모함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1597년 1월 27일자 《선조실록》을 중심으로 그 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바, 별도의 해설 없이도 독자들은 이순신을 죄인으로 몰기 위해 자행된 모함이 이루어진 경위와 모함의 실체 및 그 문제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이순신을 통제사의 직에서 몰아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1596년 11월 7일자 어전회의의 기록을 참고로 소개한다.

 

정유년(1597년) 1월 11일, 왜적의 첩자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와서 왜장 고니시의 뜻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19일 ※
“청정이 7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달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순풍이 불면 며칠 안으로 건너오게 될 것입니다. 청정이 바다를 건너오면 크게 들이치지는 못하겠지만 가까운 지경에서 노략질할 것만은 틀림없으니, 나오기 전에 미리 방비하여 간사한 꾀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즘은 계속 순풍이 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오기가 어렵지 않으니 수군을 빨리 거제도로 내보내어 머물러 있게 하고 청정의 동정을 살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오는 날에 동풍이 크게 불면 반드시 거제로 향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형세는 공격하기에 쉽습니다. 만일 정동풍이 불어 곧바로 기장이나 서생포 지경으로 향한다면 배는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게 되므로 거제와는 거리가 매우 멀어서 미처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계책을 시행하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전선 50척을 급히 기장 지경으로 돌려대어 좌도의 수군과 합세하여 진을 치고 5~6척씩 부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돌아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장수들이 청정에게 달려가 알리기를 ‘조선에서는 너를 원수로 여겨 수많은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정박하고 있다. 육군도 근처에 많이 주둔시켜 네가 나오는 날을 노리고 있으니 아예 경솔히 건너지 말라’ 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청정은 틀림없이 의심을 품어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그 사이에 조선에서도 대비하고 행장도 손을 쓴다면, 설령 청정의 머리를 베지는 못하더라도 이보다 더 유리한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배를 빨리 돌려대어 군사의 위력을 보임으로써 교활한 적들로 하여금 목을 움츠리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면 피차간에 다 좋을 것임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에 관한 요시라의 거짓 정보가 조선 조정에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월 19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월 13일에 그는 이미 부산 앞바다 다대포에 도착하여 정박해 있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1일 ※
4도 도체찰사인 우의정 이원익이 장계를 올렸다.

“기장 현감 이정견의 급보에 의하면, 청정이 이달 13일에 다대포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먼저 온 배가 2백여 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을 세웠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1일 ※
비변사에서 건의하였다.

“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너왔으나 각 도에서는 방어조치를 취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경기, 충청, 영남, 호남 등 각 도에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군사를 정비하고 요해처를 막아 각별히 변란에 대처하며 감시 결과를 통보하도록 급히 지시함으로써 뜻밖의 우환을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전라도병사로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수군 전략을 비난하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내용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앞서 살펴본 바이지만, 이순신 모함의 전후 사정을 보다 명확히 이해해 보자는 취지에서 재차 소개한다. 한편, 이순신을 배척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선조에게 있어서 이 장계는 이순신을 실각시키기 위한 확실한 구실이 되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균이 장계를 올렸다.

“신은 외람되게도 무거운 책임을 맡고 남쪽 변경의 병마사로 있으면서 우둔한 솜씨나마 다하여 만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건대 늙은 몸에 병이 이미 심할 대로 심한데다 나라에 보답한 것은 많이 못하여 전하를 우러러 통곡만 할 뿐입니다. 지금 변경에는 어려운 일이 많은 만큼 군사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형편입니다.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군사와 말을 정비하고 직접 군사들의 앞장을 서서 일거에 적을 쓸어버리고 말겠습니다.

 

그런데 수군과 육군에 대하여 말씀드린다면, 임진년 초기에 적의 육군은 줄곧 내쳐서 한 달 동안에 평양까지 쳐들어왔으나, 바다의 적들은 한 해가 지나도록 패전만 하고 끝내 남해 바다 서쪽으로는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군사 위력은 오로지 해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원균 자신은 임진왜란 초기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도 자기 관하의 배들을 몽땅 바다에 침몰시켜버리고 도망을 갔었다. 그런데도 적의 배가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계속해서 이순신의 전략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질러나가 가덕 뒤에 몰래 머물러 있으면서 가볍고 빠른 배를 골라서 서넛 또는 네댓 척씩 떼를 지어 절영도 바깥쪽에서 무력을 시위하게 하는 한편, 1백여 척이나 2백 척이 큰 바다에서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원래 바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겁을 먹고 있는 청정은 틀림없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정에서는 수군으로 바다에 나가 맞받아침으로써 적들이 뭍에 오르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고 하였는데, 일본의 첩자 요시라가 일러준 방법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육군 병사(兵使)인 자신이 수군의 전략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순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어서’ 한마디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
“신은 전에 바다를 지킨 일이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만큼,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기에 전하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적이 다시 쳐들어온 상황에서 임금의 마음이 이미 이순신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김응남과 윤두수의 발언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간신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
이산해 : 이럴 때 수군에 힘을 실어주면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에 충청도에서 마침 원균을 만났는데, 원균이 말하기를 ‘왜놈들이야 무슨 두려워할 나위나 있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멋대로 하는 소리로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수군을 믿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김신국(군기 선유관으로 이원익에게 내려갔다가 돌아왔다)이 돌아왔기에 물었더니, 신국은 도체찰사도 수군을 믿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조 : 왜적의 우두머리(소서행장)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해내지 못하였으니, 우리나라는 참으로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오늘 장계를 보니 행장도 조선에서 하는 일은 늘 이 모양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조롱당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행장보다도 훨씬 못한 셈이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왜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싸우러 나가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임진년에 정운이 죽은 것도 절영도를 거쳐 배를 몰고 오다가 적의 화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산해 :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김응남 : 이순신이 싸우러 나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정운이 목을 베려고 하자 이순신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해전에서 이긴 것은 사실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언신은 늘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하였습니다.

 

선조 : 지금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바라겠는가. 그저 배를 띄워놓고 시위나 하고 바닷길을 따라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끝내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니,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 오늘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군사를 끌고나가 위력을 시위하기로 약속은 이미 되어 있다고 하더라만…

 

(한탄하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쉬면서) 우리나라는 다 되었다. 아,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아, 어떻게 하겠는가.

 

‘이순신이 싸우러 나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정운이 목을 베려고 하자 이순신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나가 싸웠다. 그러므로 해전에서 이긴 것은 사실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이다’ 고 하였다. 이 같은 거짓 모함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반간계에 놀아나는 조선 조정

 

1월 17일에 올린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는 이러하였다. 그 역시 왜적의 거짓 첩보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는 모습이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
도원수가 두루미 한 마리와 매 한 쌍을 행장에게 보내주라고 하기에 신이 이달 6일에 군사 송충인에게 주어서 들여보냈습니다. 그가 17일에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이달 12일에 바람이 순조로워서 청정의 휘하에 있는 왜선 150여 척이 일시에 바다를 건너와서 서생포에 머무르고 있고, 청정 자신도 휘하의 배 130여 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는데, 동북풍이 불어서 배를 통제하지 못하여 거제 길로 향해 가다가 가덕도에 머물렀으며, 14일에는 다대포를 향해 가면서 진터를 살펴보았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군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아서 맞이하여 치지 못하였습니다. 바람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 것인데, 사람들이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해서 그만 앉은 채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행장도 몹시 통탄해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하는 일은 번번이 이 모양이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넜으니 나는 전날에 한 말이 청정의 귀에 새어 들어 갈까봐 걱정이다. 모든 일을 되도록 치밀하게 하라” 고 하였으며, 또 송충인에게 말하기를 “이 다음에도 할 일이 있으면 너도 꼭 돌아와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들여보내어 다시 유도하여 그 내막을 알아내 가지고 급보를 올린 작정입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이렇게 질질 끌기 때문에 결코 성사될 수가 없으니 그저 혼자서 답답해할 뿐입니다.

 

왜적이 조선에 흘린 허위 정보의 내용을 보면, 1월 13일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다대포에 도착하기 전의 보고들은 왜적이 2~3월 후에야 군대를 움직일 것이라는 내용이었고, 청정이 1월 13일에 이미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고 난 다음의 보고들은 모두 1월 19일 이후에야 조정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모두 사후보고였던 것이다.

 

청정의 군대가 1월 4일에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요시라가 1월 11일에 김응서를 만나서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조정에 도달한 것은 1월 19일이다. 청정의 군대가 1월 12일에 서생포에 도착하였다는 군사 송충인의 보고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를 통하여 1월 23일에야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청정의 군대가 1월 13일에 이미 다대포에 도착했다는 기장 현감 이정견의 급보는 이원익의 장계를 통하여 조정에 1월 21일 보고되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이 바다에 나가 기다리다가 적을 맞아서 쳐야 한다는 원균의 장계는 1월 22일에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 모든 보고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정보보고에 의하더라도 요시라가 1월 11일자에 김응서에게 건의한 “남해상에서의 청정 요격설” 은 시기적으로 이미 실천 불가능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요시라의 보고(1월 11일)→김응서의 장계(1월 19일)→조정의 지시(?)→이순신에게 전달(?)→부산 앞바다로 출동(?)으로 군사 작전지시가 하달되는 동안, 가등청정의 군사는 이미 벌써 부산 앞바다의 다대포에 도착해서(1월 14일) 조선 수군의 출동에 대비하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순신이 출동하였다면, 왜군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해전방식인 ‘사냥개 곰몰이 작전’ 에 말려들어 힘든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에서 보게 될 조정에서의 ‘이순신 탄핵’ 논의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모함의 말들만 나열해 놓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맞받아치라고 지시하려면, 적이 오기 전에 적정에 관한 분명한 정보와 작전 재량권을 주고 그에 어울리는 지시든 명령이든 내렸어야 하는데, 적정에 관한 사후 보고서에 근거하여 사후적으로 이순신에게 책임추궁을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지금부터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모함의 절정을 보도록 하자.

 

1597년 1월 27일,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제7차 어전회의를 열었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이 스스로 자기 나라를 망치기 위한 모함과 음모를 결의하는 한심한 역사적 현장이다.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발언은 《선조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가 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되었는바, 이날 역사적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회자 : 선조 이연
참석자 : 영의정 유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지중추부사 정탁, 좌의정 김응남, 영중추부사 이산해, 병조판서 이덕형, 호조판서 김수, 이조참판 이정형, 좌승지 이덕열

 

※ 《선조실록》 ※
선조 : 적선이 비록 2백 척이라고 하나 이는 가장 많은 셈이다.

 

유성룡 : 16개 부대가 거의 다 나온 모양입니다. 행장의 군사들이 두치 쪽 길로 가서 정탐한 것을 보면 전라도를 엿보는 것 같습니다.

 

선조 : 전라도 등지는 방비가 전혀 없고 또 수군으로 오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데 어쩔 셈인가.

 

유성룡 : 그곳에는 명령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군사가 곧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중간에 간사한 관리들이 권세를 농락하고 있어서 여러 장수들의 명령이 하나도 시행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명령이 떨어져도 걸핏하면 여러 달일 지나가며 오는 자도 있고 오지 않는 자도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상황입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에 나가기 싫어서 한산도로 물러가 지키고 있는 바람에 큰 계책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니, 이에 대하여 신하들로서 어느 누가 통분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탁 : 이순신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선조 : 순신이란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 계미년(1583년, 충무공이 39세 때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오랑캐를 물리치고도 이일 병사의 모함으로 죄를 입어 백의종군한 일이 있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간사하다고들 말하고 있다. 이번에 비변사에서는, 여러 장수들이 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고을 수령들도 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비변사에서 그를 두둔하기 때문이다. 명나라 관리들이 조정을 기만하고 못하는 짓이 없는데, 이런 못된 버릇을 우리나라 사람들(이순신을 지칭)이 모두 본받고 있는 것이다. 순신은 부산의 왜적 진영을 불태운 사건에 대해 조정에 거짓보고를 하였다. 영의정도 여기 있지만, 이런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할 일이다. 이제는 설사 그가 제 손으로 가등청정의 머리를 갖고 오더라도 결단코 그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유성룡 : 이순신은 신과 같은 마을 사람입니다. 신은 젊었을 때부터 알고 있는데, 그는 자기 직책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부터 꼭 대장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선조 : 그가 글은 아는가?

 

유성룡 : 그는 강직하여 남에게 굽힐 줄 모릅니다. 그래서 신이 그를 수사(水使)로 추천하였고, 임진년의 공로로 정헌대부까지 주었는데, 너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장수들이란 바라던 대로 되어 마음이 흡족해지면 반드시 교만해지고 나태해지는 법입니다.

 

‘그가 글은 아는가?’ 라는 말 속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싸울 줄은 알지만 무식한 일개 무장(武將)에 지나지 않는 자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임진년 이후의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장수에 대한 임금이 생각이 고작 이래서야 나라가 어떻게 지켜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유성룡의 답변을 보면, 유성룡조차 고니시 측에서 제보한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이순신을 모함하는 온갖 말들이 쏟아지자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

 

※ 《선조실록》 ※
선조 : 이순신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없다. 일개 무장 주제에 어찌 감히 조정을 업신여길 생각을 한단 말인가. 우의정이 내려가면서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원균을 장수로 임명할 수 없지만 적과 싸울 때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의 말은, 원균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일개 돌격대장 정도로는 쓸 수 있다고 했던 것인데, 선조는 그의 말까지 왜곡하여 인용하고 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
김응남 : 수군 중에는 원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균 만한 사람이 없다’ 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모함성 발언이다.

 

유성룡 :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이 적지 않습니다. 상당산성(청주산성)을 쌓을 적에 원균은 흙집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살면서 직접 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고 합니다.

 

선조 : 그를 수군의 선봉으로 삼고자 한다.

 

김응남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산해 : 임진년 해전 때 원균과 이순신은 장계를 천천히 올리기로 서로 약속해 놓고는, 이순신이 밤중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 공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원균은 이순신에게 원망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른 모함의 말에 불과하다)

 

윤두수 : 이순신을 전라 · 충청 통제사로 임명하고,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하면 어떻겠습니까? (노련한 언사로 선조의 화를 복돋우기 위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원균에게 통제사란 직함을 주고자 하는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인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선조 : 원균이 만일 적의 소굴로 곧바로 쳐들어간다면 누가 그를 막아내겠느냐.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 파악이다)

 

김응남 : 어사를 보내서 자세히 조사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조 : 문관(文官)을 특별히 어사로 정하여 그간의 사정을 조사하게 하면 될 것이다.

 

윤두수 · 김응남 : 이순신은 조용한 것 같지만 거짓이 많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조 : (이덕형에게) 원균 문제를 급히 처리하도록 하라.

 

이덕형 : 원균을 본래 수군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요즘 변방 장수들의 문제를 보면, 이운룡 같은 경우는 한두 놈의 도적을 보고도 나가 싸우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장계만 올리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여느 때 같으면 어찌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균을 좌도(左道)에 보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선조 : 좌도에는 보낼 수 없다. (선조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김수 : 서성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했더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너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잖아!’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원한을 품고 속이 쓰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아들 다섯이란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 부하 장수들을 가리킨 것이다)

 

이덕형 : 군사 관계 일이란 반드시 기강이 선 후에라야 앞과 뒤를 알 수 있는 법인데, 전라도의 문제는 문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이 군사 정원수 중에 군사에 관한 공부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8도에다 병조로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더니, 황해도 같은 데서는 모두 이미 올라왔는데 전라도에서는 감감 무소식입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시 중에 그런 통계를 위한 보고서 제출 요구 자체가 군사 맹(盲)인 문신들의 ‘문서놀음’ 에 지나지 않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있다)

 

선조 :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보내지 않았다가는 후에 가서 뉘우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 통신사 보내는 문제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도 오랫동안 질질 끌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선조가 왜적이 다시 쳐들어 와서 다급해지니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야겠다고 재촉하고 나온 것이다)

 

유성룡 : 사태가 이미 급박하게 된 만큼 설령 보낸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선조 : 사태를 두고 어렵다는 것인가, 아니면 의리상 어렵다는 것인가?

 

유성룡 : 사태가 벌써 급한데 어떻게 의리를 생각하겠습니까.

 

선조 : 의리야 아무리 엎어지고 자빠지게 된 형편이라 하더라도 어쩌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에 황신이 갔을 때에는 무슨 의리가 있어서 갔던가? 오늘 황제의 지시를 받들고 사신을 보내는 것만은 유독 의리에 어긋난다는 말인가?

 

이날 오후에 다시 별전으로 비변사(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의 대신들과 관련 부서의 당상관들을 불러 모아서 비슷한 논의를 되풀이한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산해, 유성룡, 윤두수, 김응남, 정탁, 김명원, 김수, 이덕형,
류성경, 이정형, 로직, 이덕열, 조집, 이순민, 심액, 이유홍

 

※ 《선조실록》 ※
윤두수 : 전날 권율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왔기에 보니까, 행장이 한창 강화를 한다고 하였지만 고성과 곤양 근처에는 적들이 함부로 드나들므로 이 사실을 행장에게 말하였더니, 행장은 그 적들은 자기들 무리가 아니며 조선에서 그 적들을 죽이더라도 자기들은 결코 가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이 선거이와 이순신 등을 시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영등포에 머무르고 있는 적과 싸우게 했더니 장문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이 구원하러 왔고, 장문포에 있는 적들과 싸우게 했더니 영등포에 있는 자기 적들이 구원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행장의 군사는 바라보기만 할 뿐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런 때에는 역시 오는 대로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수(권율)가 길에서 왜적 5~6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 적들이 만약 원수가 단출한 일행으로 다닌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체찰사도 검소한 사람인데, 만일 경솔하게 처신한다면 안 되겠습니다.

 

지난 번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에 대하여 이미 건의하였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에 대하여 전하께서는 이미 훤히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번 문제에 대하여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행장이 다 알려주었는데도 해내지 못하였으니, 중요한 고비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문제지만, 이순신을 교체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윤두수는 임진년에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큰소리 쳐놓고는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친 일이 있었고, 불과 5개월 전에는 총책임자로서 장문포 전투를 기획, 실패하게 함으로써 수많은 희생자만 내게 한 경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그 죄를 몽땅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는 가증스러운 모습이다.

 

※ 《선조실록》 ※
정탁 : 사실 죄는 있지만 위급한 때에 장수를 바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조 : 나는 아직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사람이 꽤 영리한 것 같기는 한데 임진년 이후로 한 번도 큰 공을 세운 게 없다. 이번 일로 말하면, 하늘이 마련해 준 기회인데도 이용하지 않았다. 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번번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원균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중국 관리들은 이 제독 이하 조정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이런 것을 본받는 자가 많다. (이순신을 지칭하고 있다) 적의 병영에 불을 지른 문제만 해도 김란서와 안위가 비밀리에 약속하고 한 일이라는데, 순신은 마치 자기가 계책을 세워서 한 듯이 보고하였으므로 나는 대단히 언짢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설사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온다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자에 소개된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1596년 12월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병영에 불을 지른 화재사건의 실상은 선조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선조는 이순신의 장계조차 신뢰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왜곡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과연 적장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용서해주지 못할 정도의 잘못이었던가?

 

※ 《선조실록》 ※
이산해 :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 : 공로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체로 앞장서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유성룡 : 신은 이순신과 같은 마을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조 : 서울 사람인가?

 

유성룡 :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인 이거의 자손입니다. 신은 이순신이 맡은 일을 잘 감당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당초 그를 추천하여 조산 만호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선조 : 그는 글을 아는가? (또다시 이순신을 일개 무식한 무장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유성룡 : 그렇습니다.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므로 취할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느 고을 수령(진도 군수)으로 있을 때 신이 그를 전라 좌수사로 천거한 것입니다. 임진년에 차령을 지나는 길에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되고 원균은 가선대부로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은 너무 지나치게 높은 벼슬로 표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관 장수들이란 뜻을 쉽게 이루면 쓸 수 없게 되는 법입니다.

 

선조 : 그때 원균이 자기 아우 전을 보내어 이겼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창한 것이다.

 

유성룡 : 거제에 들어가 지키면 영등과 김해의 적들이 반드시 꺼려하겠지만, 오랫동안 한산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는 별로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바다 길에서 역시 맞이하여 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교체하는 동안에 사태가 어려워질 것 같았으므로 전날에는 그렇게 건의했던 것입니다. 비변사에서 어찌 이순신 한 사람을 두둔할 리 있겠습니까?

 

선조 : 이순신은 결코 용서해줄 수 없고, 무장으로서 조정을 업신여기는 버릇에 대해서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순신이 조산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도 녹둔도의 둔전문제로 그곳에 있었는데, 순신과 김경눌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번은 순신이 야인 한 사람을 잡아서 밤중에 김경눌을 속였더니 김경눌은 치마를 입고 달아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경눌은 속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위험한 곳에서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순신 같은 변방장수로서 그런 농질을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전에 벌써 들었다. (한번 미운 감정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는 식이다)

 

이정형 : 이순신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은 물론 안다. 그러나 한산도는 배를 감출 수 있어 적들이 깊은 실정을 모르지만, 거제는 그 속이 넓기는 하나 배를 감출 데가 없을 뿐더러 안골포의 적들을 건너편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므로 들어가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다’ 고 했습니다. 그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선조 : 들어가서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는데,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정형 : 신도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원균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부터 의분심에서 공을 세웠으나 단지 군사들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선조 : 성질이 포악한가?

 

이정형 : 경상도 전체가 파괴된 것은 모두 원균 때문입니다.

 

선조 : 우의정이 내려가면서 적과 맞서 싸울 때에는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짐작할 만하다.

 

김응남 : 인심을 잃었다는 말은 우선은 덮어두고, 수군에 기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 : 이억기를 내가 전에 보았는데 쓸만한 사람이었다.

 

이정형 : 원균만은 못합니다.

 

선조 : 원균은 제 의견만 내세우면서 굽히거나 고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체찰사가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성룡 : 대체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있습니다. 상당산성을 쌓을 때 흙집을 만들고 거처하면서 공사를 감독하여 쌓았습니다.

 

이산해 : 상당산성을 쌓을 때에 그는 위엄을 가지고 공사를 감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습니다.

 

이정형 : 상당산성 공사를 완공하기는 했지만 비가 와서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선조 :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명령하면 순신은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앞에서는 복종하지만, 원균은 성을 벌컥 내면서 듣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공로를 덮어버린 것 때문인가? 원균을 좌도 수군에 소속시키고 또 누군가를 시켜서 두 사람을 눌러놓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정형 : 이순신과 원균은 형편을 보아 서로 어울릴 수 없겠습니다.

 

김수 : 원균은 늘 이순신이 자기 공로를 덮어버렸다는 말을 신에게 하였습니다.

 

이덕열 : 이순신이 원균의 공로를 빼앗아 권준의 공로로 만들었는데, 원균과는 의논도 없이 먼저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때 왜적들의 배에서 여인을 잡아 가지고 사실을 알아낸 다음 앞질러 장계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원균의 공로를 빼앗았다’ 고 했는데, 전혀 말이 안 되는 모함이다. 장계에 관한 것도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함이다)

 

선조 : 그때 왜장이 3층 다락배에 관을 쓰고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그 배는 몹시 얇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배와 서로 부딪치자 곧 깨어졌다고 한다. 왜선이 지금도 그곳에 있으니 배를 통째로 잡았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닌 것 같다.

 

전라도에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치다꺼리 때문에 수군과 격군들을 제때에 정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모두 이순신에게 책임을 따질 수 없다.

 

김수 : 부산의 적 군영을 불사른 일도 원래는 이순신이 안위와 비밀히 약속하였는데, 딴 사람이 앞질러 먼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 공로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그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정형 : 변경에서 있은 일을 멀리서 헤아릴 수는 없으니, 천천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김수 : (부산에 불 지른 공로를 이순신이 가로챘다는) 그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유성룡 : 그것은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고무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윤두수 : 원균과 이순신을 모두 통제사로 임명하여 힘을 합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 : 비록 두 사람을 갈라서 통제사로 임명하더라도 그들을 화해시키고 견제할 사람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판에 뛰어드는데도 이순신이 물러나 앉아서 지원하지 않으면 형편이 어렵게 될 것 같다.

 

김응남 :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에게 무거운 죄를 줘야 합니다.

 

선조 : 문관으로 두 사람을 조절하게 해서 그들이 어렵게 여기는 데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미 통제사로 임명된 이상 수군을 모아야 할 터인데 왜 정비하지 않았는가?

 

유성룡 : 겨울에는 수군들을 놓아 보낸다고 합니다.

 

김수 : 의례히 10월에는 수군을 놓아 보내는 것이 규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처 정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윤두수 : 신이 남원에 있을 때 이순신이 군관을 남원에 보내어 군사를 모으는데, 심지어 그곳의 아전 병방(兵房)의 목을 자르기까지 했습니다. 백성들이 술렁거리고 통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기에 군관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멀고 가까운 친척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군사를 모을 때에 좋지 못한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1593년부터 1594년에 수차례에 걸쳐 올린 바 있는 《도망병이 있을 경우 일족 중에서 대신 징발하여 충당하지 말라는 지시를 취소하여 주기를 청하는 장계》와 관련된 사건으로, 한 나라의 대신이 이런 문제의 중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모함에 써먹고 있는 모습이다.

 

※ 《선조실록》 ※
선조 : 원균에게 수군을 갈라 통솔하게 하는 문제에 대하여 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덕형 : 그가 하려고 한다면 신의 생각에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로 방해하는 폐단이 있을 것 같으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에서 참장(參將)들이 사우는 경우 싸움을 감독하는 사람을 두는 것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윤두수 : 종사관이 싸움을 감독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 : 전적으로 조절할 일을 맡은 사람을 반드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유성룡 : 한효순에게 싸움을 감독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 : 아무나 한군데에 같이 있게 되면 그들도 틀림없이 조심을 할 것이다. 그리고 병사는 누구에게 대신 시켰으면 좋겠는가?

 

김수 : 그곳 사람들은 나주 목사를 병사로 임명했으면 합니다.

 

유성룡 : 글을 내려 보내어 두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덕형 : 박진의 말에 의하면, 이순신의 군관이 원균한테 갔다가 돌아와서는 저희들끼리 간사한 말을 선동하여 주장(主將)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 군관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점점 이렇게 되어갑니다.

 

원균의 온갖 비행에 대해서 이순신의 부하 군관들이 이런저런 말을 한 것을 가지고 하는 모함이다. 한 장수의 온갖 비행은 당연히 진영 안에서 온갖 말들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발언이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
선조 :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하는 것이 좋다. 오늘 관리 인사 이동 때 원균도 임명할 수 있겠는가?

 

이정형 :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면 일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경솔히 해서는 안 되겠으니 잘 살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산해 : 요시라와 행장을 후하게 대해 주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다음에도 또한 기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산해는, 자기 나라의 위대한 장수에게는 죄를 주자고 청하면서 적장과 왜적의 첩자에게는 후한 상을 주자고 건의하고 있다. 이날 이복남을 전라도 병마수군절도사로, 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