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매니지먼트 회사 <수기획>의 사무실은 여의도에 있는 태양빌딩 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의도에는 수기획뿐만 아니라 많은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의도에 TV 방송국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의도에서는 방송국과 매니지먼트 사무실을 오가는 가수며 탤런트 등 많은 인기스타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한때는 영화인들의 메카 충무로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TV가 영화를 압도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여의도는 충무로를 제치고 국내 연예계의 최고 메카가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진 요란한 옷차림의 스타 지망생들이 방송국 주위를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모습들이 가끔씩 눈에 띄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여 스타가 된 어느 여자 탤런트의 이야기가 모 주간지에 실리고 나서는 더욱 심해졌다.)

 

또, 단 한 번만이라도 직접 만나보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방송국 현관문 앞이나 주차장 근처에 서서 며칠씩 진을 치고 있는 어린 여학생들의 볼썽사나운 모습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밖에는 이미 완전한 어둠이 깔려 있었고 서울의 어디나 그렇듯이 번쩍이는 네온이 곳곳마다 명멸하고 있었다.

 

수기획 사장실에는, 에어컨이 윙윙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람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에 더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장발을 깔끔하게 뒤로 묶어 넘긴 이기수는 꽃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된 커다란 그의 책상 앞 가죽의자에 깊숙이 앉아 채지연의 얘기를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기수는 탄탄하고도 우람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각진 턱에 콧수염을 기른 얼굴은 그를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뒤로 훤히 트인 유리창을 통해서 휘황한 조명에 싸여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는 국회의사당이 멀리 보였다.

 

창과 문을 제외하고 그의 방은 온통 패널에 붙여진 자기 휘하 스타들의 대형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다크 브라운 칼라를 배경으로, 상큼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채지연의 전신 브로마이드도 있었다. 황금빛의 사각단추가 붙어 있는 노란색의 원피스는 기장이 아주 짧았기 때문에 그녀의 우유빛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 보였다.

 

그 원피스와 똑같은 색깔의 노란 모자를 쓰고 서 있는 그녀는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부린 무릎을 받치면서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자태였다. 시원스레 쭉 뻗은 늘씬한 다리와 가지런한 하얀 치아, 그것을 감싸고 있는 빨갛고 도톰한 입술,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그녀의 고혹적인 두 눈동자가 그녀의 싱싱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채지연은 여지껏 꼬았던 다리를 풀고 핸드백 속에서 가늘고 긴 초콜릿 색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신문에 발표되면 오히려 우리의 일이 쉬워지진 않을까요? 이제부터는 아예 드러내놓고 일을 할 수 있잖아요.”

 

장발을 가지런히 뒤로 묶은 이기수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되면 박 의원의 정치생명도, 지연이의 연기생활도 끝장이야. 지연이의 연기생활도 중요하지만 박 의원의 현재 위치, 나아가서는 먼 미래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정치생명이 끝난 박 의원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녀는 눈을 아래로 깔고 담배연기만을 후우하고 뿜어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신문에 발표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야. 우리 계획 자체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렇게 돼선 안 돼지… 아직은 비밀이 유지되어야만 해.”

 

이기수는 묵묵부답한 그녀에게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기에 평상시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나? 이번 일은 더욱 조심해서 행동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러자 채지연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던지며 항변했다.

 

“저도 보안에 대해서는 하느라고 했어요. 도대체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가 사실을 눈치챘을까요? 박 의원이 한 짓은 아닐까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어.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장날 판인데.”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가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엄하게 말했다.

 

“어느 과정에서인가 실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만에 하나, 지연이의 행동에 실수가 있었다면 규칙에 따라 그 어떤 형태로든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거야.”

 

“난 처벌 따윈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채지연이 담배연기를 후우하고 뿜어내며 쏘는 듯이 말하자 이기수가 꾸짖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할 일이 아니야. 사사로운 행동의 조그만 잘못으로도 우리 전체에 큰 해를 끼칠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해. 일전에 죽은 박명호를 생각해봐.”

 

이기수의 그 말에 채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박명호는 자신의 20층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한 경제기획원의 차장급 고위관리였다. 그의 직위 때문에 매스컴에서 한동안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억측이 난무해졌다. 하지만 밝혀낸 것이라고는 그 죽음이, 스스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확실한 진상을 아는 사람은 이기수와 채지연을 포함한 몇 사람뿐이었다.

 

공포에 떠는 채지연의 모습을 보고 이기수는 부드럽게 어조를 바꾸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은 문 기자 그놈이 확실한 내용을 아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만 어디선가 얘기를 주워듣고 와서는 지연이를 떠본 것뿐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 이기수는 한참 동안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채지연은 구석에 있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어 컵에 따라 이기수에게 건네주었다. 이기수는 쥬스를 마시다 말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문제는 어떻게 그놈이 사실을 눈치챘을까 하는 점이야. 우선 그걸 알아내야 돼. 그놈에게 정보를 준 누군가가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한다면 문 기자도 문제지만 정보를 문 기자에게 준 그놈이 더욱 문제야. 그놈을 찾아내서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돼. 정보를 준 놈은 지연이를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지연이에게 무언가 앙심을 품고 있을 거야. 지연이를 잘 알고 있고 지연이에게 앙심을 품을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기수는 채지연을 쳐다보았다. 채지연이 잠시 한 손을 턱에 괴고 생각하더니 혼자말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의 성공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 가령 지난번 황룡영화제 때 내가 신인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 배아파 하는 사람이라든지…”

 

채지연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반짝 빛이 나더니 생각난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 인물이라면 동료 탤런트들일 수도 있어요. 가령 이번에 <여명>에서 내가 주연으로 발탁된 데 따른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졌다든가 하는… 또는 캐스팅 결정과정에서 나에게 밀려 주연자리를 뺏겼다든가 하여 앙심을 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맞았어. 바로 그거야.”

 

이기수는 왼손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교차시켜 ‘딱!’ 소리를 냈다.

 

“이번 <여명> 캐스팅에 지연이와 경합해서 끝까지 올라온 애들이 누구누구였었지?”

 

“최은영, 오유미 그리고 고명숙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그 셋 중에 하나일까요? 어떻게 알아내죠?”

 

이기수는 대답 없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아낼 방법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열쇠를 꺼내 한 켠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철제 캐비닛 중 맨 구석의 하나를 열어제쳤다. 그 맨 아래 서랍에서 한 납작한 상자를 꺼내어서 들고 책상에 올려놓았다.

 

상자의 뚜껑 표면에 인쇄된 영문글자가 선명했다. 채지연이 놀랍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위저 보드(Ouija Board)>군요!”

 

이기수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그가 일어섰다.

 

“어디가 좋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이기수가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우리 예전에 자주 가던 그곳으로 가지…”

 

그의 가슴에 가벼운 흥분이 일렁이고 있었다.

 

 

문영환은 그 시간, 자신의 침대에 누워 수화기에 대고 무엇인가를 주문하고 있었다.

 

“아, 거 말예요. 지난번 것보다 성능이 더 좋아야 돼요. 저번 것은 중간에 그만 감도가 형편없이 떨어져서 아주 애를 먹었단 말씀이야.”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간신히 하나 구해놓은 것이 있긴 합니다. 일본서 들여온 것입니다. 이번 것은 틀림이 없을 겁니다만 값이 좀 비싸서… 잘 아시겠지만 이건 전혀 수입이 안 되는 거라서 말이죠…”

 

눈썹을 찌푸리고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쳇! 장사꾼들이란 어디나 똑같군.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서 그저 비싸게 받을 궁리만 한다니까… 좋아요, 그럼 그걸로 하기로 하고… 또 TZ-4모델로 두 개 정도 필요한데… 극소형으로 두 개만 구해주시오.”

 

“예? TZ-4 극소형으로 두 개씩이나요? 그건 지금 없는데요. 한 달 정도 기다리셔야 됩니다. 극소형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어디서 구해볼 수가 없겠지만요.”

 

문영환이 화를 냈다.

 

“아니 그럼, 나보고 일을 하지 말라는 거요? 그러지 말고 어디서든 구해보시오. 정 구할 수 없다고 해도 당신들 기술로 그런 것쯤은 충분히 만들 수 있잖소? 어디 하루이틀 장사하오?”

 

“아,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보죠.”

 

“기한에 늦지 않도록 해주시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TZ-4모델까지 사용하시려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큰 건인가보죠?”

 

문영환이 불쾌하다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소? 가격 흥정이나 합시다.”

 

그들은 잠시 가격에 대해 밀고 당겼다. 결국에 합의된 금액은 애당초 문영환이 생각한 것보다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그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막 끊었을 때, 엷은 미색 네들리제 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영환의 아내 김주옥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스카치 위스키가 담긴 술잔이 두 개 들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술잔 하나를 뺏듯이 낚아채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녀가 뭐랄 사이도 없이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상큼한 비누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이미 알몸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마이 달링… 사랑해…”

 

“아이, 좀 천천히…”

 

그의 아내 김주옥은 밀려드는 포만감에 눈을 감았다.

 

 

채지연은 방안을 둘러보고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강변에 위치한 특급호텔인 <필그림> 제일 위층인 24층에 자리잡은 스위트 룸 <로즈>의 실내장식은 정말 훌륭한 것이었다. 커다란 더블베드가 두 개씩이나 딸린 이 방은 필그림 호텔의 객실 총지배인인 홍정길이 그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태리제의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은은한 조명으로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쓰였음직한 호화로운 의자와 응접세트가 부드러운 곡선미를 뽐내고 있었다. 녹색 체크무늬가 엷게 수놓인 연갈색 커튼은 현대적 감각의 색채로,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중후한 멋을 내고 있었다. 커다란 거울이 붙은 화장경대 옆에는 33인치 대형 텔레비전에서 M-TV가 제공하는 뮤직 방송이 한창이었다.

 

채지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에 깔아놓은 붉은 빛깔의 페르시아 양탄자를 바라다보았다. 그것은 <미로찾기 게임>과도 비슷한 사각형과 타원형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문양이었다.

 

‘미로찾기?’

 

그녀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아, 자신의 인생은 무엇을 찾아 헤매던 미로찾기 게임이었던가?

 

그녀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혐오스럽고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는 절대로 슬픈 옛날의 초라한 <박정미>가 아니었다. 자신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현대의 우상 <히로인 채지연>이었다. 비록 영혼을 판 대가였지만 그녀의 위치는 그녀 자신이 원하는 이상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 수 있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나야.”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기수였다.

 

그는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채지연을 먼저 올려보낸 후 호텔 커피숍에서 있다가 20분이 지나서야 올라온 것이었다. 그는 이 방의 호사스러운 장식과 구조에 익숙한 듯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프랑스제 의자에 앉은 뒤 몸을 구부려 쇼핑백에 싸온 물건을 꺼냈다.

 

조그만 상자가 푸른색의 응접탁자에 올려졌다. 그리고 그가 굵은 손가락으로 상자를 열어 꺼내 보인 것은 가로 세로가 약 20cm 정도이고 두께는 1cm 되는 하트 모양의 나무 판자였다. 판자 바닥에는 조그마한 무방향성 바퀴가 세 개 달려 있어서 마치 최신형의 스케이트 보드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트의 뾰족한 꼭지점에는 시계바늘 도형의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고, 그 표면은 붉은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그것은…

 

<위저 보드>였다. 그것은 원래 전통적으로 내려온 영매용(靈媒用)의 기구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놀이용 완구가 되었으며, 미국에서만도 천만 개 이상 팔린 히트 상품이었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그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위저 보드를 프랑스에서는 플랑쉐(Planchette)라고 불렀으며 독일에서는 사이코그라프(Psycho-graph)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에서도 수입되어서 몇십만 개가 팔려 나갔고 일본에서의 상품명은 일본식 영어발음인 위자 보데, 위자반, 또는 영응반(靈應盤)이었다.

 

위저 보드가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즉 위저 보드에는 접신(接神)의 효력이 있다고들 믿었던 것이다. 위저 보드를 사용하면 죽은 혼령이나 또는 유령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며, 일단 혼령을 불러내어 자신이 알고 싶은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 위저 보드를 통해 대답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효과에 대해 전혀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아주 극소수의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위저 보드의 진정한 효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놀이의 일종이었다. 그것도 영적으로 너무나도 위험한…

 

 

채지연은 푸른 탁자 위에 놓여 강렬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빨간색 하트 모양의 위저 보드를 감개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하트의 오른편에, 끝이 세 개로 갈라져 초록색 방울이 그 끝에 달려 있는 모자를 쓴 피에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자의 눈, 귀 옆의 짧은 노랑머리, 빨간 딸기코, 두터운 입술이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이었다. 삐에로는 파란 점이 박힌 노랗고도 풍성한 바지를 입고, 초록색 방울이 달린 길다란 신발을 신고서 오른손으로는 하트의 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노란 글씨의 대문자로 유혹하듯 ‘Have A Nice Time!(멋진 시간 보내세요!’ 라고 써 있었다.

 

이기수가 채지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놀이를 해볼까? 지연이도 이 위저 보드에 대해서 교육받은 적이 있겠지?”

 

“물론이에요. 기본적인 교육과정에서였죠.”

 

“좋아.”

 

채지연이 일어나 TV를 끄고 돌아와 다시 앉았다.

 

이기수는 접혀진 도화지 한 장을 상자에서 꺼내어 펼쳤다. 그것은 위저 보드에 사용되는 문자판이었다. 거기에는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가 빼곡히 적힌 빨강 파랑 노랑의 칸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맨 위쪽 왼편에 A자를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해 가며 B, C, D, E… 순으로 Z까지 나열되어 있었고, 맨 아래칸에는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채지연이 그를 올려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내가 할 일이 뭐죠?”

 

“위저 보드를 잡아줘.”

 

“좋아요.”

 

채지연은 펼쳐진 도화지 위에 위저 보드를 올려놓고 한 바퀴 돌려 원을 그려보았다. 바퀴가 부드럽게 회전하였다.

 

“느낌이 괜찮은데요.”

 

“아무렴. <모스>사 제품인걸…”

 

그녀는 움찔했다. 그녀에게 그건 의미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위저 보드를 쳐다보았다.

 

‘Have A Nice Time!’ 글씨 밑에 뭐라고 작은 문자가 써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제조회사 명으로 <Moss Toy Inc. Made in U.S.A. (모스 완구 주식회사, 미국제조)> 라는 글씨가 작게 써 있었다.

 

이기수가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의 말에 채지연은 위저 보드 위에 오른손을 가만히 얹고 나서 눈을 감았다. 이기수는 그런 채지연의 모습을 보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채지연의 어깨가 꿈틀했다.

 

이기수가 소리쳤다.

 

“왜 그래? 어깨에 힘을 빼! 너 자신을 잊어버려. 이 순간 너는 <권능의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돼!”

 

채지연이 감았던 눈을 뜨고 계면쩍게 웃었다.

 

“미안해요. 해본 지가 오래 되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에요. 다시 할게요.”

 

채지연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채지연이 조금 긴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이기수는 갑자기 그녀에게 낮은 음성의 영어로 말했다.

 

“릴랙스! 릴랙스! 테이킷 이지! 힘을 빼! 긴장을 풀어!”

 

이기수의 그 말에 채지연은 미국에서의 생활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 환상처럼 곱슬머리의 흑인이 벌거벗은 채 자신에게 외치는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릴랙스! 테이키리지! 그래, 미국에 있었을 때 이런 것쯤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지…

 

 

이기수의 중얼거림이 계속되자 채지연은 어느덧 깊은 침묵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외부의 어떤 힘에 내맡겼다.

그렇게 2, 3분쯤 흘렀을까?

 

순간 채지연의 머리카락이 미풍에 날리듯 잠시 흩날리더니 이번에는 위저 보드에 올려놓은 오른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것을 본 이기수가 중얼거림을 멈추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기수는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국식 영어였다. 나무랄 데 없는 유창한 발음이었다.

 

“Are you here, now? (너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가?)”

 

그러자 위저 보드에 놓인 채지연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위저 보드는 문자판 위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이윽고 아래쪽으로 이동하더니 하트 모양의 꼭지점에 그려져 있는 화살표가 <Y>자를 가리켰다.

 

이기수는 그 글자를 뚫어져라 주시하곤 입으로 되뇌였다.

 

<…Y…>

 

거기서 잠시 멈춘 위저 보드는 다시 움직여서 이번에는 화살표가 위쪽으로 움직이더니 <E>에서 멈췄다.

 

<…E…>

 

채지연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 움직임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듯이 아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채지연의 오른팔은 그저 위저 보드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채지연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눈을 감을 채 여전히 깊은 침잠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다.

 

다시 위저 보드는 원을 그려가면서 천천히 움직이더니 <S>에서 멈췄다.

 

<…YES(그렇다)…>

 

이기수가 다시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좋아, 그럼 내 질문에 답해 주기 바란다. 그래 줄 수 있는가?”

 

멈추어 섰던 위저 보드가 다시 우아하게 움직이며 화살표가 글자를 하나씩 하나씩 짚어갔다.

 

<…S…U…R…E(좋다)…>

 

이기수는 채지연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안색이 차츰 창백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변화였다.

 

“우린 지금 한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 새한 스포츠 문영환이 지연이와 박 의원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채지연의 손이 느릿느릿 움직여 위저 보드의 화살표는 알파벳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I…K…N…O…W…I…T(알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아까와는 완연히 다르게 시시각각 파리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문영환이 누군가에게서 제보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생각이 맞는가?”

 

<…R…I…G…H…T(맞다)…>

 

이기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이기수는 채지연을 쳐다보았다. 답을 알아낼 시간은 충분한 것 같았다.

 

“문영환은 우리 조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는가?”

 

<…N…O…T…H…I…N…G(없다)…>

 

그녀의 입술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좋다… 그럼, 문영환에게 제보하여 준 사람은 누구인가?”

 

<…T…V…S…T…A…R(TV 스타)…>

 

“TV 스타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

 

그녀의 하이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파리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O…Y…O…U…M(오유ㅁ)…>

 

위저 보드의 움직임이 끝나기도 전에 그 의미를 짐작한 그가 성급하게 물었다.

 

“오유미라고? 그녀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이제는 채지연의 얼굴이 완전히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입술은 푸른 정도를 넘어서 보랏빛을 띠었다.

 

이기수는 그녀가 어떻게든 조금만이라도 좀더 버티어주길 바랐다.

 

<…H…O…T…E…L(호텔)…>

 

“호텔이라고? 무슨 호텔인가?”

 

<…E…S…P…R…I…T(에스쁘리)…>

 

그녀의 몸이 천천히 한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

 

<…Y…E…S(그렇다)…>

 

“오유미는 우리 조직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위저 보드 위에 얹힌 채지연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기수는 더 이상 채지연의 체력이 버티지 못할 걸 알아차렸다.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그녀의 생명이 위험했다.

 

<…N…O…T…H…I…N…G(없다)…>

 

“고맙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만 가도 좋다.”

 

그것을 끝으로 채지연의 위저 보드에 얹힌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한 번 움찔하더니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기수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무너져내리려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칠하지 않은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표정도 호흡도 없어보였다. 이기수는 황급히 그의 두터운 손으로 그녀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채지연이 깊고 어두운 침잠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채지연은 마치 한바탕 꿈을 꾼 양, 초점 풀린 눈으로 이기수를 한참 쳐다보다가 그제야 생각난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났나요?”

 

“그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쉬어야만 돼.”

 

이기수의 표정이 근심에 싸여 있었다. 차츰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겹쳐 보이던 사물들이 차츰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채지연은 이기수에게 안긴 채 한참 동안 그대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였죠? 문영환에게 제보한 사람은?”

 

이기수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짧게 내뱉었다.

 

“오유미.”

 

“오유미… 역시 그녀가 문제의 제보자였군요… 그래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요.”

 

“아직은 우리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야. 하지만 오유미, 이년을 한 번 만나봐야 돼. 그러면 그 동안의 경과를 모두 알 수 있겠지… 그런 다음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자구.”

 

이제 채지연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손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자신의 신체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빠른 회복이었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 낼 수 있을까요?”

 

이기수는 채지연을 처벌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물론이지… 얼마든지 우리 둘이서 해결해 낼 수 있을 거야. 우리 둘이서…”

 

이기수는 ‘둘이서’ 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넣으며 말했다.

 

채지연은 이기수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요. 우리 둘이서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채지연은 한 팔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이기수는 감회가 새로운 듯 채지연을 내려다보고는 꿈꾸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지연이의 이 기분 좋은 살냄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맡아본 지도…”

 

 

남자는 여자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여자는 남자의 손길을 저항 없이 가만히 받아들이면서 남자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블라우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노브라였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탐스러운 유방이 그대로 드러났다. 분홍빛 젖꼭지가 하늘을 향해 있는 유방에서 샤넬화이브의 은은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에는 사내의 본능을 자극하는 강렬한 힘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사내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풀어헤친 사내의 근육질의 탄탄한 가슴에는 금으로 꼰 굵은 줄의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펜던트의 둥근 황금의 원판 중앙에는, 동글동글 말려 올라간 커다란 뿔이 두 개 달린 염소머리가 양각되어 있었다. 두 눈은 붉은 루비로 장식되어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벌어진 입 사이로 세모꼴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 있었다. 그 염소 주위로 동그랗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이 염소머리 위에서 갈라진 혀를 내밀고 있었다.

 

 

짐승처럼 털이 무성한 사내의 가슴이었다. 여자의 가녀린 하얀 손이 사내의 가슴털을 부드럽게 쥐어뜯었다.

 

손가락 끝에 몇 가닥의 가슴털이 뽑혀졌다. 그것이 남자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의 입술이 여자의 분홍빛 포도송이를 가볍게 물음과 동시에 손이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 아…”

 

여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입을 벌려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가 뱉어내는 욕망의 숨결이 상대를 더욱 자극시켰다. 그녀의 살결은 우유처럼 희고 매끄러웠다.

 

그는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거칠게 눕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짧은 치마를 걷어 내렸다. 여자는 엉덩이를 들어서 그의 손길을 도와주었다.

 

남자는 뱀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감고, 한 손으로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린 조그만 천조각을 우악스럽게 찢어버렸다. 찢어진 천조각이 공중을 날았다.

 

곧 이어 그녀의 탄력 있고 부드러운 미끈한 다리를 보호하고 있던 스타킹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여자는 기대감에 부푼 나머지 숨을 헐떡였다. 그녀에게 지금은 에너지를 보충할 시간이었다.

 

여자의 두 손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조급한 놀림으로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침대 밑으로 그의 바지가 던져졌다.

 

남자의 억센 허리를 껴안은 하이얀 두 팔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그리고 침대는 출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환희와 땀에 젖은 짐승 같은 신음소리가 온 방안에 메아리쳤다.

 

 

그들의 절정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땀을 흘리면서 그는 넌지시 그러나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솜씨가 더욱 늘었는데… 이봐 아이람, 에스쁘리 호텔에서 박 의원과 잠자리할 때 어땠어? 그의 테크닉이 좋았나?”